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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목장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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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새새
댓글 0건 조회 17회 작성일 26-04-0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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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님들 수고많습니다.
부활주일 설교 요약입니다.


매일매일 부활의 삶을 삽시다!

본문 - 고전 15장 29 -34절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그런 잊을 수 없는 날이 있습니다.

가장 복된 날이 있습니다.

그날은 바로 우리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근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주님의 개인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그 부활의 능력이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초대 교회는 매 주일이 부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 주일 그 부활의 은혜를 경험했던 겁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부활절이 일 년에 한 번 드리는 어떤 의식적인 날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도 부활절이 지켜졌던 것 같습니다. 29절입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아마 신약성경에서 이 말씀보다 더 난해한 구절은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해석의 열쇠가 되는 것은 죽은 자들을 위하여? 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초대 교회 이후로 수십 가지의 해석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죽은 자를 대신해서 산 자가 세례를 받는 의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었지만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 의식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이 해석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면 죽은 자를 대신한 세례는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성경적인 의식을 사도가 아무 설명 없이 인용한다면 결국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는 가장 그럴듯한 해석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를 죽은 자 앞에서 또는 죽은 자들 위에서로 해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도 부활절의 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들이 부활절이 되면 어떤 것들을 합니까?

삶은 계란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혹은 새로 믿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거나 온 성도들이 함께 성찬을 나누는 의식을 가집니다.

 

우리는 조금 댕겨서 합니다만

근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예 먼저 죽은 성도들의 무덤을 찾아가서 그 무덤 앞이나 또는 위에서 새로 믿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줌으로

죽은 성도들의 신앙을 본받게 하거나 혹은 산 자와 죽은 자가 주님 안에서 연합되는 의식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 후자를 더 지지하는 이유는 처음에는 초대 교회가 그러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부활이 점점 하나의 의식이나 절기로 전락하여 갔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성도들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매일이 부활절이었고 매주일이 부활절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침체되어 있고 아무리 낙심해 있어도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말만 들으면 다시 살아났습니다.

 

여러분,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절기가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그리고 단순히 앞으로 세상 마지막에 모든 사람들이 다 살아난다는 희망 사항도 아닙니다.

 

부활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지금 주님이 살아 계신다! 살아계셔서 나의 일 거수, 일투족을 다 보고 계신다!

그리고 내가 어떤 상황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나를 얼마든지 다시 일으켜 세워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 시간 저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기적이 나타나는 것이 정상입니까? 정상이 아닙니까?

질문이 어렵습니까?

정상이라 답하시니 제 가슴이 벅찰 정도로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 안에 그런 힘이 없다면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선한 싸움을 이 세상에서 싸워나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바로 그 주님의 함께 하심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물론 우리를 통해 주님의 역사가 늘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상황이 아주 절망적으로 기울어져서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주님을 소망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주님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일하고 계시는구나!

이것이 바로 부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나 자신의 형편을 보면 도저히 살 소망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엇인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기도가 응답 되고 있으며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해결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바른 의미입니다.

 

영적인 어린아이가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겪는 어려움은 어려움이고 주님의 부활은 주님의 부활인 사람입니다.

이게 따로 구분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를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밤새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부활 신앙이 무엇입니까? 그 절망적인 상황을 주님께 맡기는 겁니다.

또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이 무엇인지 찾아서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큰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끝까지 길이 보여야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아닙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아주 작은 일을 믿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기초해서 또 작은 길이 열립니다.

처음부터 다 된 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상황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믿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살아남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비참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살아 계신 이상 나는 일어서게 되어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미래에 대한 분명한 소망이 흐려지면서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많이 따라갔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 당시에 유행하던 애기의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33절입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누군가가 나쁜 친구들과 자꾸 사귀면 결국 그도 그렇게 변하게 되어 행실이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자꾸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고 세상 방식으로 살려고 한 것 같은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까?

그것은 부활의 신앙이 분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굳이 세상을 거부하면서 경건하게 살려고 몸부림칠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그러니 점점 세상에 동화되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신앙생활 했던 것? 다 까먹어 버리고 완전히 그 모든 행실이 더러운 사람이 되고만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에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강한 양심의 소리가 있었고 끊임없이 주님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를 완전히 떨치고 일어서는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34절입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여기 깨어? 라고 하는 것은 정신을 차리라는 말입니다.

지금 죄에 빠져 있는 자리에서 결단하고 일어서라는 뜻입니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말고 지금 잘못되어 있는 자리에서 일어서라는 겁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일어서게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사람과 만나고 있는 사람은 더 무서운 지옥에 떨어지기 전에 갈라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동안 우리나라가 도덕적으로 급격하게 타락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못된 목표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도덕적으로 더 깨끗하며 더 정직한 사람들이 되는 것을 목표로 세웠더라면 계속 자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더 많이 벌고 세상 적으로 더 부요하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막상 돈이 생기고 나니까 먹고 마시며 타락하게 된 겁니다.

 

우리의 목표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세우면 결국 악한 동무에게 빠지게 됩니다.

세상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가 영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더 많이 주님의 말씀을 알고 더 많이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더 많이 겸손해지고 더 많이 순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악한 것이 틈을 탈 여유가 없게 됩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로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것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많이 심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더 많이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결국 그런 쪽으로 발전해 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른 목표가 없으면 자기가 아무리 노력을 많이 한다고 해도 결국 행실이 더러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34절 중 반절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라는 것은 고린도 교인 중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 가운데서 전혀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사는 자가 있었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의 삶 중에서 가장 위험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전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죄짓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부활이라는 겁니다.

 

지금 낙심되고 침체되어 있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이 부활이지

일 년에 한 번 개란 삶아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부활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신앙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악한 동무들과 어울려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그런 죄에서 일어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불순종한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이제는 영원히 남을 인생을 사셔야 합니다. 하늘나라에서 많은 천사와 성도들이 우리의 영적인 싸움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남은 생애를 이 부활의 신앙으로 승리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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