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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 목장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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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새새
댓글 0건 조회 43회 작성일 25-09-2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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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님들 수고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배우기 – 솔선수범

본문 – 느헤미야 5장 14 - 19절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사고방식에 익숙해지면?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는 말이 쉽게 들리지만 막상 남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이해하려 하면 굉장한 자기 절제와 자기 비움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여자와 남자는 매우 달라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배우자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만

굳어진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일은 마음 먹는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해의 필요를 인정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의 사고 훈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마음만 먹으면 바로 되는 일도 있지만 아무리 마음먹어도 훈련이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의 굳은 사고도 바꾸기 위해서는 다르게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근데 우리는 이것이 매우 쉽고 저절로 이루어질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내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으로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관점이 내 것이 될 때까지 꾸준함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삶의 진정한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말씀의 빛 앞에 서야 합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꾸준하게 서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삶으로의 변화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 앞에 끊임없이 서고 그 말씀에 올바르게 반응할 때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모습이 여러분의 삶에 꼭 있기를!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자 이제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먼저 15절을 보세요.

이 말씀은 느헤미야의 자기 고백적인 기록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에 의하면 느헤미야가 이전의 총독과는 달리 백성의 것을 토색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면 적어도 이 정도의 자존심은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자들이 이중장부를 기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뇌물을 받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이런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나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기에 바쁜 것은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그저 남들이 걷는 대로 걸어가기가 바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한 채 말입니다.

 

소금 역할을 하고 빛의 역할을 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으니 사회는 자연히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역사적 비극 중에 하나는 우리 민족이 소위 출세나 성공을 책임의 의미보다는 벼슬을 얻는 것?

혹은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흔히 선친이나 조상을 자랑할 때 우리는 선친이 무슨 벼슬을 했다는 식으로 자랑합니다.

벼슬자리에 오른 선친이 자랑스러운 어떤 일을 했다면 그것이 자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단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어떻게 자랑이 됩니까?

영향력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을 사모하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재능과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책임 있는 우리 사회의 영역들에 진출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그리스도인들도 출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께서 가르치신 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공을 갈망하는 사람마다 무거운 책임의 십자가를 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되는 것은 책임지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는가?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위로 올라가는 기회를 그 역할을 위한 책임으로 열망해야 한다는 거지요.

 

느헤미야를 보면 느헤미야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바로 백성입니다. 다시 15절 보십시오.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에서 그가 백성들의 현실을 직시한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도 보십시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의 생각 깊은 곳에 백성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가 있잖아요.

느헤미야에게 총독의 자리는 이 백성을 섬기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그에게 총독의 기회는 섬김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총독에 오르면서 가장 먼저 이전 총독들처럼 백성들을 착취하는 총독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실천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요?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15절 하 반절 다시 보십시오.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그가 총독으로서 백성을 섬긴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그의 소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 백성을 섬기도록 부르셨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지한 섬김으로 이 부르심에 응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근대사에 이런 부르심 앞에 진정으로 백성을 섬기기 위한 동기로 응답한 지도자가 별로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니 이 비판이 자조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성공을 섬김의 기회로 삼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 각계각층에서 일어나야 할 겁니다.

 

무엇보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렇다면 섬김의 삶은 선택일 수 없습니다.

섬김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양식이어야 합니다.

섬김이 우리 삶의 실존이요 본질이어야 하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살펴볼 것은 16절입니다.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여기 힘을 다하며! 라는 말에 주목해 보십시오. 최선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그의 모든 종자들도 그렇게 일을 했다고 합니다.

느헤미야의 종자들? 참모들도 동일한 심정으로 주의 소명을 최선을 다했다는 겁니다.

 

이와 동일한 고백을 한 신약의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디모데 후서 4장 7, 8절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운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저는 최선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입니다.

이분은 대통령의 자리에서 퇴임한 후 더 주목을 끈 대통령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모토가 바로 최선이었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그가 이 모토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채택하게 된 동기가 있었답니다.

그가 해군 사관학교 졸업한 후, 임관 직전에 해군 제독과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제독은 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한 뒤 해군 사관 시절 성적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카터는 자신 있게 자신의 성적을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카터의 성적이 졸업생 820명 중 59등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름 괜찮은 성적이잖아요. 졸업생 중 7% 안에 드니까요.

 

근데 제독이 잘했군? 하는 칭찬 대신에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자네의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그 말에 청년 장교 카터가 땀을 흘리며 답을 합니다.

글쎄요! 최선을 다했다고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겠지요!

 

그러자 제독이 벼락같은 음성으로 되물었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



여러분, 언젠가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다 살고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신 분?

우리의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설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이것이 그대가 나를 믿고 나의 부르심을 받아 살아 온 최선의 결과인가? 물으신다면 여러분의 대답은 어떨 것 같습니까?

이 질문에 후회함이 없는 답을 할 수 있도록 오늘 아니 여러분의 남은 삶 신실하게 진실하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양 – 신실하게 진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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