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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 나눔(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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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새새
댓글 0건 조회 45회 작성일 25-03-16 08:38

본문

목자님들 수고 많습니다. 축복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2) - 우리는 동일한 터위에 세워진 자들입니다!

본문 - 에베소서 2 : 20절

 

우리가 신앙체계를 좀 이상하게 갖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얼마나 이 말들을 오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믿음이 적어서 고민해 본 적이 있습니까?

믿음이 약해서 믿음이 좋은 분에게 가서 충고를 받는데 이렇게 충고하는 겁니다. 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이 말? 맞아요? 아니 큰 믿음을 가졌으면 오지도 않았지요.

그런 믿음이 없어서 찾아온 것 아닙니까?

그러면 있게 해 주든지 해야지! 그냥 큰 믿음을 가지면 된다!

사실은 이것만큼 황당한 이야기도 없는 겁니다.

 

이떤 분이 Tv에서 한 애기입니다.

결국 죽음도 삶도?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다 하나가 아닌가?

그러니 예수도 공자도 결국은 다 하나다!

 

야, 굉장하지요? 세지요? 대단한 연합 아닙니까?

예수까지 포함시키니까요. 그러나 기독교는 말할 때마다 뭐라 그럽니까?

 

당신들? 불교 믿으면 안 됩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선행을 해도 예수를 모르면 안 됩니다!

이슬람교도 안 됩니다. 박태선은 더 안 됩니다. 문선명은 더욱 안 됩니다!

 

그럼 뭐만 남지요? 주만 남는 거지요. 주, 예수?

우리가 얼마나 배타적입니까?

 

오늘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겁니다.

주안에서 건물마다 연결되어 있고 그 건물이 연결될 때 그것을 연결하는 중요한 게 하나 있는데 그게 뭐라는 겁니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라는 겁니다. 20절 같이 읽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여러분,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이 터가 아닌 곳에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불가능합니다.



오늘 이 터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터 하니까 생각나는 구절이 없습니까? 마태복음 7장이지요.

거기에 보면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게 실천의 문제 때문에 일어난 싸움입니까?

아니면 근거, 기초 때문에 일어난 싸움입니까? 근거, 기초의 싸움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는 반석 위에 지어서 안 무너졌고 다른 하나는 모래 위에 지어서 넘어진 싸움이지 실천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참 약합니다.

 

이름을 대어서 죄송합니다만 베레아라는 동네는 상당히 곤란한 동네입니다.

이 동네는 1.5단을 넘어 1.9단쯤 가 있는 동네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과 분명히 한 쪽을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정말 그런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의 품으로 가던지 아니면 불 못으로 가든지 그렇지 귀신이 되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다 사탄이 하는 장난입니다.

 

근데 제가 미치고 팔짝 뛸 일은 그쪽 동네에 있는 몸이 아픈 사람에게 가서 물으면 귀신이 말을 하는데 뭐라 하는가 하면 나는 몇 날 며칠에 죽은 누구의 혼이다! 그러는 겁니다.

 

이런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없습니다.

그걸 보고 우리 신앙인들이 너무 순진한 것이요.

진짜 죽은 영혼이 귀신이 되는 줄 생각하는 겁니다.

사탄이 사기 치는 것인데?

성경은 그런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영매를 금하고 있다는 겁니다.



영매라는 것은 혼을 불러내는 자들? 구약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요.

사울이 가서 영매에게 가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 달라! 하지요.

그래서 사무엘을 불러 주는데 그게 진짜 사무엘이 아닙니다.

사탄이 장난을 친 겁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성경이 영매를 금하는 것은 진짜 죽은 혼을 불러낼 수 있기 때문에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마귀의 장난질이기 때문에 금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사탄은 믿는 사람들을 미혹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는 자입니다.

영광의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자들이라?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까?

 

한 신자를 미혹하기 위해 죽은 사람 흉내 내는 것은 사탄에게 너무나 쉬운 겁니다.

그 일을 위해 무슨 짓이든 못하겠습니까?

근데 그것도 모르고 그들 앞에 가서 와, 대단하다! 그러고 앉았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신앙의 터라고요? 오직 말씀?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신앙의 터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위에 그런 것들을 올려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오늘날 교회를 공격하는 것 중에 가장 위험한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이슬람도 아닙니다.

교회를 표방하면서 진리를 왜곡하는 이런 것들이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 할 겁니다.

 

그런 것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신자들 간에 갈등을 일으키고 복음을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무서운 겁니다.

 

그중에 제가 몇 가지 이름을 드는 수밖에 없는데 앞에 말한 베레아가 있고요.

구원파가 있고요. 신천지가 있습니다. 또 요새는 동방교가 상당히 뜨고 있습니다.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연합의 근거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진리가 우리의 연합의 근거지 내가 절실히 필요한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 채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 대단한 충성을 했던 사도 바울이 예수님께 세 번이나 간청했지 않았습니까?

이 가시를 뽑아 주십시오! 예수님이 안 들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욕심으로 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해야 하는 복음 사역 때문에 그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한 것인데 예수님의 대답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오히려 약한 데서 네가 더 강하여진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바울이 안 겁니다.

내가 내 약한 것으로 인해 더 주님을 찾고 찾으므로 더 강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보통 이 근거에서 잘못되어 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앉아야 할 자리에 자기가 자꾸 앉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자꾸 뺏습니다.

 

이것이 터가 잘못되어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대로 사랑 장입니다.

사랑에 대한 말씀이 그렇게 많이 나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행위적으로 말씀합니까? 그렇습니까? 아니지요. 전부 다 성품 적입니다.

8절부터 12절까지 봅니다. 한 절씩 교독하십시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아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서 중요한 말이 9절, 10절, 12절에 반복적으로 나오는데요.

부분적으로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것은 다 부분적이다!

은사를 경험하는 것도 부분적이고 아는 것도 부분적이다!

여기에서 예외인 사람이 없습니다.

 

목사라 해서 성경에 대해 100% 다 알까요? 그런 분이 없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12절의 말씀처럼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합니다.

이때의 거울은 구리거울을 말합니다. 구리를 잘 닦아 거울로 썼습니다.

 

잘 안 보이니 대충 보이니 누가 봐도 다 멋있게 보입니다.

 

우리가 구리거울로 보면 자기 얼굴은 멋있을 거라는 맹종 속에서 보는데 사실은 희미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여 볼 것이요! 바로 이것이 해답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셔서 우리를 키워나가시는 가장 큰 부분이 어디냐 하면 우리의 성품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성품을 고쳐가는 방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밖에 알지 못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방언에 대해서는 이만큼 아는데 성경에 대해서는 요만큼 밖에 알지 못합니다.

반대로 성경에 대해서는 이만큼 아는데 기도에 대해서는 약합니다.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같은 터, 말씀의 터 위에 있다면 같은 예수 안에 있다면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싸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사랑이 등장하는 겁니다. 사랑해라가 아닙니다.

다들 아직 자라는 과정속에 있기 때문에 기다려 주라는 의미에서 사랑해라 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근데 어떤 분은 자기가 잘하는 한 가지로 너무 폼을 잡으려 합니다.

아직 참 신앙이 뭔지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걸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 사람도 완성시킬 것이고 나도 완성시킬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확인하는 바는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멀었다!

나는 그래도가 아니고 아직도 이 부분이 너무 약하구나!

그래서 더 많이 말씀을 붙들고 더 많이 기도의 무릎으로 나아가는 모습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겁니다.




어떤 신앙의 한 부분을 깊이 경험했을 때에도 내가 다른 부분에서는 미약한데!

그렇게 생각하고 그 약한 부분에서도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더 겸손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신앙의 싸움을 이 한해 싸워갈 수 있는 그래서 부족한 부분까지도 아름답게 채워지는

그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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