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1일 금요일 목장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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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 나눔입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본문 - 로마서 1 : 13 -16절
여러분은 언제 부끄러움을 당해 보셨습니까?
오늘 본문 16절에서 그와 똑같은 부끄러움이란 단어를 사도 바울이 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여러분, 이 말이 옛날에는 부끄러워했는데 지금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실력을 키워서 이제는 더 이상 부끄러움을 당할 필요가 없는 그런 위치에 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 고백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자식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했을 때 자식이 잘되면 그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연약해서 당한 부끄러움이라면 힘을 키우면 그 부끄러움도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야기하는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그가 복음을 통해 신분 상승을 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지위를 가졌기 때문에가 아니라는 겁니다.
실은 그 반대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더 많은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더 많은 수치를 당했습니다.
복음 때문에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있는 것까지 다 잃어야 했습니다.
그가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고백하지 않습니까?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도 여러 차례 갇혔다! 매도 수없이 맞았고 여러 번 죽을 뻔했다!
이렇게 복음 때문에 더 어려움을 당하고 더 수치를 당하는데 나는 복음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4절에서 그 이유를 말합니다.
헬라 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이 빚진 자 의식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복음 때문에 당하는 부끄러움을 복음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을 감당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복음 때문에 잃어버리고 복음 때문에 수치를 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뭔가?
나에게 복음의 빚진 자 의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존 스타트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쓴 로마서 주석이 있는데요.
참 좋은 주석입니다.
그 주석에 보면 이 빚진 자 의식에 대해 정확하게 해석을 해 놨습니다.
가령 내가 A라는 사람으로부터 백만 원을 빌렸다고 합시다. 그럼 A라는 사람에게 백만 원을 빚진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A라는 사람을 보면 내가 백만 원을 갚아야 하는데 하는 빚진 자의 의식이 있게 되겠지요.
근데 바울이 이야기하는 이 빚진 자의 의식은 그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른가 하면 실은 A라는 사람이 나에게 백만 원을 주면서 뭐라 이야기했는가 하면 그 돈을 당신이 쓰고 그걸 나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B라는 사람에게 그 돈을 주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B라는 사람에게 백만 원을 줘야 하는 빚진 자라는 거지요.
이게 우리가 받은 복음의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A라는 사람에게 돈을 빌렸기 때문에 실은 그 사람에게 빚진 자인데 그게 아니고 B라는 사람에게 전해 주라 했기 때문에 그 B라는 사람에게 내가 빚진 자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바울이 가진 빚진 자의 의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내가 빚진 자다! 라고 고백하는 그 말이 실제 이방인들에게 돈을 빌려서 그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랑을 저들에게 꼭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에
저 이방인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야, 내가 주님께 부탁받은 것을 꼭 전해 줘야 하는데 하는 것이 빚진 자의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바로 이 빚진 자의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 의식 때문에 복음을 전하면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일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겁니다. 주님으로부터 진 빚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진 빚을 전해 주려고 하는데 그 빚진 것을 갚으려고 하는데 그것을 받는 로마 사람들이 그 빚을 갚지 말라 하는 겁니다.
바울보고 야, 너, 빚 갚아! 주님께서 부탁하신 것 있지 그것 빨리 줘!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주님이 부탁하신 일을 하려고 하는데 싫다는 것입니다. 안 받겠다는 겁니다. 그런 것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받겠다 하는 이유를 고린도 전서 1장에 보면 22, 23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여러분, 주님이 부탁한 것을 빚진 의식으로 전해 주는데 그것을 받는 자들은 야, 그것 듣기 싫다! 날 괴롭히지 말라!
그 엉터리 같은 소리하지 마라! 그러면서 비아냥거린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을 생각해 전해 주는 것인데 어떻게 이런 수치를 줄 수 있습니까?
너무 귀한 것을 전해 주려 하는데 말입니다.
근데 세상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너나 믿으라! 한다는 겁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에게 빚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주님께 부탁받은 것이기에 그것을 전해 주는 것인데 문전 박대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모욕감까지 주더라는 겁니다.
근데 거기에 덧붙여 바울이 하는 말이 나에게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이 복음 전하는 일에 내 생명도 내어놓을 각오가 있다!
결단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 16절이 그 해답을 줍니다. 16절 같이 읽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 로다!
내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것만이 사람을 영원히 살릴 수 있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만나야 영원한 기쁨을 가질 수 있고 복음을 만나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그 거대한 죄의 벽을 박살 낼 수 있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권세도 죄인 한 사람을 건져낼 능력이 없는데 천국 백성 되게 하는 방법이 없는데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고 하늘 백성이 되게 해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이 복음이 부끄럽지 않다! 당당히 애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 말이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람들이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항상 뭐냐 하면 자신이 능력이 있을 때입니다.
그렇지요? 앞에서 애기한 것처럼 영어 실력이 없으니까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그래서 영어 실력을 키우면 그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게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대학 문턱에도 가지 않은 사람이 내가 대학에서 가르치겠다!
그럴 때 누가 그것을 허락하겠습니까? 웃기고 있어! 더 배우고 와! 할 겁니다.
대학원을 나와야 대학 강단에 설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세상 적으로 능력을 갖추려면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도 나오고 해서 당당하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능력입니다.
근데 바울은 뭐라 그러는가 하면 세상 적인 그런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능력도 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복음만이 지옥 갈 백성을 천국 가게 하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능력을 발휘라는 것이 복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어떻게 복음을 전하면서 있게 된 부끄러움을 극복하셨습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게의 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복음만이 사람들을 살리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주님도 저와 여러분을 천국 백성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 지시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천국 백성 되는 그 기쁨 때문에 십자가의 온갖 수치를 참아내셨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게의치 않았다는 말을 우리가 씁니다만 영어로 보면 Despising the shame! 입니다.
Despising이라는 단어를 쓰는데요. 혐오감이라는 뜻입니다.
Despising the shame? 혐오스러운 부끄러움?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신 모습? 혐오스러운 부끄러움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데롱, 데롱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수많은 여자들이 쳐다보는 자리에서 그 무엇 하나 가진 것 없이 십자가에 달려 계셨던 그 예수님의 모습은 수치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모멸감을 느끼게 한 것은 로마 병정들의 말이었습니다.
남은 구원하고 너 자신은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
우리가 예수님 같으면요. 능력이 있으니까 그냥 십자가에서 내려가 멋도 모르고 지껄이는 그 사람들을 쓸어버리지 않겠습니까?
너나 구원해라! 너 자신 하나도 구원하지 못하는 게! 무슨 남을 구원하냐!
그 모든 수치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다고요? 그 앞에 있는 즐거움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죄의 사슬을 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영광 때문에 오직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 전하다가 욕을 먹었다고요? 괜찮습니다.
복음 전하다 너나 잘 믿으라! 그런 소리 들었다고요? 괜찮습니다.
복음은 저 사람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저들을 지옥에서 건져내 하늘나라에 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사업이 망했습니까?
그래서 이제 복음을 전하면 안 됩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성공했으니까 복음 전하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이제 드디어 복음 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겁니까? 그것은 기복 신앙입니다.
교회가 무슨 사회단체입니까?
무슨 똑똑한 사람들만 모아 놓은 것이 교회입니까?
여러분,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사업에 망한 것?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예수 잘 믿었는데 병에 걸려서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하는 성도들?
한 번도 부끄러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 성도님들을 부끄럽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성공했건 실패했건 돈이 많건 적건 상관없이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내가 망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내가 바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내가 세상에서 못 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저는 그 성도 때문에 부끄럽습니다. 너무 부끄럽습니다.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럽습니다.
복음을 잘못 가르친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갈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어떻게 식민지 나라의 사람이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나를 통해 나타날 복음의 능력 때문에!
이 복음으로 천국 백성 될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에!
그 즐거움을 바라보며 모든 수치를 능히 극복하고 복음을 전한 바울처럼 그리고 모든 십자가의 수치를 감당한 그 주님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그 능력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열심 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본문 - 로마서 1 : 13 -16절
여러분은 언제 부끄러움을 당해 보셨습니까?
오늘 본문 16절에서 그와 똑같은 부끄러움이란 단어를 사도 바울이 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여러분, 이 말이 옛날에는 부끄러워했는데 지금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실력을 키워서 이제는 더 이상 부끄러움을 당할 필요가 없는 그런 위치에 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 고백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자식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했을 때 자식이 잘되면 그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연약해서 당한 부끄러움이라면 힘을 키우면 그 부끄러움도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야기하는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그가 복음을 통해 신분 상승을 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지위를 가졌기 때문에가 아니라는 겁니다.
실은 그 반대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더 많은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더 많은 수치를 당했습니다.
복음 때문에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있는 것까지 다 잃어야 했습니다.
그가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고백하지 않습니까?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도 여러 차례 갇혔다! 매도 수없이 맞았고 여러 번 죽을 뻔했다!
이렇게 복음 때문에 더 어려움을 당하고 더 수치를 당하는데 나는 복음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4절에서 그 이유를 말합니다.
헬라 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이 빚진 자 의식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복음 때문에 당하는 부끄러움을 복음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을 감당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복음 때문에 잃어버리고 복음 때문에 수치를 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뭔가?
나에게 복음의 빚진 자 의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존 스타트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쓴 로마서 주석이 있는데요.
참 좋은 주석입니다.
그 주석에 보면 이 빚진 자 의식에 대해 정확하게 해석을 해 놨습니다.
가령 내가 A라는 사람으로부터 백만 원을 빌렸다고 합시다. 그럼 A라는 사람에게 백만 원을 빚진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A라는 사람을 보면 내가 백만 원을 갚아야 하는데 하는 빚진 자의 의식이 있게 되겠지요.
근데 바울이 이야기하는 이 빚진 자의 의식은 그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른가 하면 실은 A라는 사람이 나에게 백만 원을 주면서 뭐라 이야기했는가 하면 그 돈을 당신이 쓰고 그걸 나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B라는 사람에게 그 돈을 주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B라는 사람에게 백만 원을 줘야 하는 빚진 자라는 거지요.
이게 우리가 받은 복음의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A라는 사람에게 돈을 빌렸기 때문에 실은 그 사람에게 빚진 자인데 그게 아니고 B라는 사람에게 전해 주라 했기 때문에 그 B라는 사람에게 내가 빚진 자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바울이 가진 빚진 자의 의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내가 빚진 자다! 라고 고백하는 그 말이 실제 이방인들에게 돈을 빌려서 그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랑을 저들에게 꼭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에
저 이방인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야, 내가 주님께 부탁받은 것을 꼭 전해 줘야 하는데 하는 것이 빚진 자의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바로 이 빚진 자의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 의식 때문에 복음을 전하면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일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겁니다. 주님으로부터 진 빚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진 빚을 전해 주려고 하는데 그 빚진 것을 갚으려고 하는데 그것을 받는 로마 사람들이 그 빚을 갚지 말라 하는 겁니다.
바울보고 야, 너, 빚 갚아! 주님께서 부탁하신 것 있지 그것 빨리 줘!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주님이 부탁하신 일을 하려고 하는데 싫다는 것입니다. 안 받겠다는 겁니다. 그런 것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받겠다 하는 이유를 고린도 전서 1장에 보면 22, 23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여러분, 주님이 부탁한 것을 빚진 의식으로 전해 주는데 그것을 받는 자들은 야, 그것 듣기 싫다! 날 괴롭히지 말라!
그 엉터리 같은 소리하지 마라! 그러면서 비아냥거린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을 생각해 전해 주는 것인데 어떻게 이런 수치를 줄 수 있습니까?
너무 귀한 것을 전해 주려 하는데 말입니다.
근데 세상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너나 믿으라! 한다는 겁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에게 빚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주님께 부탁받은 것이기에 그것을 전해 주는 것인데 문전 박대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모욕감까지 주더라는 겁니다.
근데 거기에 덧붙여 바울이 하는 말이 나에게 그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이 복음 전하는 일에 내 생명도 내어놓을 각오가 있다!
결단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 16절이 그 해답을 줍니다. 16절 같이 읽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 로다!
내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것만이 사람을 영원히 살릴 수 있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만나야 영원한 기쁨을 가질 수 있고 복음을 만나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그 거대한 죄의 벽을 박살 낼 수 있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권세도 죄인 한 사람을 건져낼 능력이 없는데 천국 백성 되게 하는 방법이 없는데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고 하늘 백성이 되게 해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이 복음이 부끄럽지 않다! 당당히 애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 말이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람들이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항상 뭐냐 하면 자신이 능력이 있을 때입니다.
그렇지요? 앞에서 애기한 것처럼 영어 실력이 없으니까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그래서 영어 실력을 키우면 그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게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대학 문턱에도 가지 않은 사람이 내가 대학에서 가르치겠다!
그럴 때 누가 그것을 허락하겠습니까? 웃기고 있어! 더 배우고 와! 할 겁니다.
대학원을 나와야 대학 강단에 설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세상 적으로 능력을 갖추려면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도 나오고 해서 당당하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능력입니다.
근데 바울은 뭐라 그러는가 하면 세상 적인 그런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능력도 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복음만이 지옥 갈 백성을 천국 가게 하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능력을 발휘라는 것이 복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어떻게 복음을 전하면서 있게 된 부끄러움을 극복하셨습니까? 히브리서 12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게의 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복음만이 사람들을 살리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주님도 저와 여러분을 천국 백성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 지시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천국 백성 되는 그 기쁨 때문에 십자가의 온갖 수치를 참아내셨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게의치 않았다는 말을 우리가 씁니다만 영어로 보면 Despising the shame! 입니다.
Despising이라는 단어를 쓰는데요. 혐오감이라는 뜻입니다.
Despising the shame? 혐오스러운 부끄러움?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신 모습? 혐오스러운 부끄러움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데롱, 데롱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수많은 여자들이 쳐다보는 자리에서 그 무엇 하나 가진 것 없이 십자가에 달려 계셨던 그 예수님의 모습은 수치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모멸감을 느끼게 한 것은 로마 병정들의 말이었습니다.
남은 구원하고 너 자신은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
우리가 예수님 같으면요. 능력이 있으니까 그냥 십자가에서 내려가 멋도 모르고 지껄이는 그 사람들을 쓸어버리지 않겠습니까?
너나 구원해라! 너 자신 하나도 구원하지 못하는 게! 무슨 남을 구원하냐!
그 모든 수치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다고요? 그 앞에 있는 즐거움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죄의 사슬을 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영광 때문에 오직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 전하다가 욕을 먹었다고요? 괜찮습니다.
복음 전하다 너나 잘 믿으라! 그런 소리 들었다고요? 괜찮습니다.
복음은 저 사람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저들을 지옥에서 건져내 하늘나라에 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사업이 망했습니까?
그래서 이제 복음을 전하면 안 됩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성공했으니까 복음 전하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이제 드디어 복음 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겁니까? 그것은 기복 신앙입니다.
교회가 무슨 사회단체입니까?
무슨 똑똑한 사람들만 모아 놓은 것이 교회입니까?
여러분,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사업에 망한 것?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예수 잘 믿었는데 병에 걸려서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하는 성도들?
한 번도 부끄러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 성도님들을 부끄럽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성공했건 실패했건 돈이 많건 적건 상관없이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내가 망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내가 바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내가 세상에서 못 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저는 그 성도 때문에 부끄럽습니다. 너무 부끄럽습니다.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럽습니다.
복음을 잘못 가르친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갈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어떻게 식민지 나라의 사람이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나를 통해 나타날 복음의 능력 때문에!
이 복음으로 천국 백성 될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에!
그 즐거움을 바라보며 모든 수치를 능히 극복하고 복음을 전한 바울처럼 그리고 모든 십자가의 수치를 감당한 그 주님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그 능력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열심 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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