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일 목장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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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4일 목장 나눔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안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본문 – 고린도 후서 5장 14 –17절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은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에 따라 한평생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도 인생관의 변화, 세계관의 변화라 말할 수 있습니다.
생각이 바뀝니다. 보는 시각이 바뀝니다. 세계관이 바뀝니다.
근데 예수를 믿기는 해도 세계관이 안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그것이 그 본인에게도 문제가 되고 또 많은 사람에게까지 폐를 끼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샤머니즘 같은 무속 종교 같은 것이 그 속에 턱 깔려 있습니다.
또 불교적인 것이 있고 유교적인 것이 있고 그리고 우리가 뺄 수 없는 것으로 식민지 문화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 속에 있는 겁니다.
이런 세계관을 바꾸려 하면 참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 안에 깊이 뿌리 박은 타성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 17절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임 됨을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것이 되었도다! 다시 창조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근데 새로운 피조물이라 할 때 새로운, 새것에 대한 오해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변화가 많고 변질이 많습니다.
이 변화라고 하는 데 대한 오해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첫째가 이른바 지성인들에게 많이 있는 변화로 진화적 변화입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변화입니다.
지금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는지 모릅니다.
이것과 맞물려서 같이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도태되는 것입니다.
요즘 청년들 보면 컴퓨터나 휴대폰을 정말 잘 다릅니다.
어떤 때보면 밥 먹으면서도 합니다.
게임도 하지만 물건도 사고팔고요. 송금도 합니다.
이것이 뭔가 하면 새로운 환경으로 가는 진화입니다. 여기서 뒤떨어지면 안 되는 겁니다.
같이 가든지 앞서 가든지 해야 되는데 이런 변화를 우리가 진화적 변화라 하겠습니다.
또 하나는 중요한 변화가 있는데 인격적 변화입니다.
인격적 변화? 우리가 말하는바 교육을 통해서입니다.
깨닫고 느끼고 또 결심하고! 그러면서 사람이 다시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인격적 변화입니다.
그리고 가장 귀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적 변화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가 되는 것이니까요.
어떤 분의 말대로 내가 예수 믿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구원 얻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진짜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적 변화입니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무에서 유로 변하는 그런 변화를 재창조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창조적 변화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튼 인간적인 노력으로 가령 술을 끊는다, 담배를 끊는다 또는 다이어트를 한다 하는 이런 변화를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창조적 변화가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변화를 우리가 같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실한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죽고 난 뒤 시작되는 변화를 말합니다.
여기에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14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붙드는 겁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죽었으니까 나도 죽은 겁니다.
나는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죽은 것입니다.
죽었다면 죽은 겁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죽었습니다. 이걸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의 변화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위대한 신앙 고백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누가 산 거라고요? 예수 그리스도?
참 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죽으면?
내가 죽으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근데 그 못된 것이 아직 살아 있어요. 그 교만, 그 자존심, 그 욕심 말입니다.
빨리 죽어야 하는데 아직도 못 죽였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보고 사도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나는 죽었다! 나라는 것은 없다! 그렇게 선언해 보십시오.
안될 일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완전한 죽음이 있고 그 위에서 완전히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작용합니다.
부활의 생명력?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 15절은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여기 중요한 핵심 단어가 위하여입니다.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실패는 목적에 있지 결과에 있지 않습니다.
근데 사람들은 목적도 생각지 않고 방법도 생각지 않고 딱 한 가지 결과만 생각하고 실패했다거나 성공했다고 합니다.
바로 거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목적이 잘못된 것입니다.
다시 물어보십시오. 돈을 왜 법니까?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왜 일을 합니까? 밥은 왜 먹습니까?
사랑은 무슨 사랑을 합니까? 목적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만 우리가 해야 합니다. 목적과 방법?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겁니다.
돈을 얼마나 벌었는가? 못 벌었는가? 그건 노 코멘트입니다.
그건 묻지 말고 목적을 바로 하고 방법을 바로 하면 됩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목적이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 선한 일이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면 말입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하는 것인가?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결혼이든 사업이든 내가 아닙니다.
내가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내 행복이 아닙니다. 내 드러남도 아닙니다.
그럼 결국은 실패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의 목적이 분명하길 바랍니다.
오직 주의 영광? 거기에 목적이 분명히 맞추어져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의 목적이 주의 영광에 맞추어져 있으면 거기에 아름다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새로운 화목의 관계, 하나님과의 화목? 나 자신과의 화목? 이웃과의 화목? 모든 사람에게 다 반가운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18절 보세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저 사람은 나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나는 저를 사랑해서 화목합니다.
또 서로, 서로 불화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사이에 들어가서 화목 시킵니다. 내가 있음으로 화목합니다.
나는 Peace naker입니다.
반대로 Trouble naker?
남 사이 좋은데 들어가서 이간 붙이고 꼭 말썽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Peace naker가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 시킨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자기 희생을 통해 화목을 심고 화목을 만들어내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나 중심적이던 사람이 완전히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나 주도적으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그리스도 주도적으로 사는 겁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 된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삶 이런 모습으로 꼭 살기를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안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본문 – 고린도 후서 5장 14 –17절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은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에 따라 한평생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도 인생관의 변화, 세계관의 변화라 말할 수 있습니다.
생각이 바뀝니다. 보는 시각이 바뀝니다. 세계관이 바뀝니다.
근데 예수를 믿기는 해도 세계관이 안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그것이 그 본인에게도 문제가 되고 또 많은 사람에게까지 폐를 끼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샤머니즘 같은 무속 종교 같은 것이 그 속에 턱 깔려 있습니다.
또 불교적인 것이 있고 유교적인 것이 있고 그리고 우리가 뺄 수 없는 것으로 식민지 문화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 속에 있는 겁니다.
이런 세계관을 바꾸려 하면 참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 안에 깊이 뿌리 박은 타성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 17절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임 됨을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것이 되었도다! 다시 창조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근데 새로운 피조물이라 할 때 새로운, 새것에 대한 오해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변화가 많고 변질이 많습니다.
이 변화라고 하는 데 대한 오해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첫째가 이른바 지성인들에게 많이 있는 변화로 진화적 변화입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변화입니다.
지금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는지 모릅니다.
이것과 맞물려서 같이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도태되는 것입니다.
요즘 청년들 보면 컴퓨터나 휴대폰을 정말 잘 다릅니다.
어떤 때보면 밥 먹으면서도 합니다.
게임도 하지만 물건도 사고팔고요. 송금도 합니다.
이것이 뭔가 하면 새로운 환경으로 가는 진화입니다. 여기서 뒤떨어지면 안 되는 겁니다.
같이 가든지 앞서 가든지 해야 되는데 이런 변화를 우리가 진화적 변화라 하겠습니다.
또 하나는 중요한 변화가 있는데 인격적 변화입니다.
인격적 변화? 우리가 말하는바 교육을 통해서입니다.
깨닫고 느끼고 또 결심하고! 그러면서 사람이 다시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인격적 변화입니다.
그리고 가장 귀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적 변화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가 되는 것이니까요.
어떤 분의 말대로 내가 예수 믿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구원 얻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진짜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적 변화입니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무에서 유로 변하는 그런 변화를 재창조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창조적 변화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튼 인간적인 노력으로 가령 술을 끊는다, 담배를 끊는다 또는 다이어트를 한다 하는 이런 변화를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창조적 변화가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변화를 우리가 같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실한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죽고 난 뒤 시작되는 변화를 말합니다.
여기에 귀중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14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붙드는 겁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죽었으니까 나도 죽은 겁니다.
나는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죽은 것입니다.
죽었다면 죽은 겁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죽었습니다. 이걸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의 변화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위대한 신앙 고백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누가 산 거라고요? 예수 그리스도?
참 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죽으면?
내가 죽으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근데 그 못된 것이 아직 살아 있어요. 그 교만, 그 자존심, 그 욕심 말입니다.
빨리 죽어야 하는데 아직도 못 죽였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보고 사도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나는 죽었다! 나라는 것은 없다! 그렇게 선언해 보십시오.
안될 일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완전한 죽음이 있고 그 위에서 완전히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작용합니다.
부활의 생명력?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 15절은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여기 중요한 핵심 단어가 위하여입니다.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실패는 목적에 있지 결과에 있지 않습니다.
근데 사람들은 목적도 생각지 않고 방법도 생각지 않고 딱 한 가지 결과만 생각하고 실패했다거나 성공했다고 합니다.
바로 거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목적이 잘못된 것입니다.
다시 물어보십시오. 돈을 왜 법니까?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왜 일을 합니까? 밥은 왜 먹습니까?
사랑은 무슨 사랑을 합니까? 목적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만 우리가 해야 합니다. 목적과 방법?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겁니다.
돈을 얼마나 벌었는가? 못 벌었는가? 그건 노 코멘트입니다.
그건 묻지 말고 목적을 바로 하고 방법을 바로 하면 됩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목적이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 선한 일이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면 말입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하는 것인가?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결혼이든 사업이든 내가 아닙니다.
내가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내 행복이 아닙니다. 내 드러남도 아닙니다.
그럼 결국은 실패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의 목적이 분명하길 바랍니다.
오직 주의 영광? 거기에 목적이 분명히 맞추어져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의 목적이 주의 영광에 맞추어져 있으면 거기에 아름다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새로운 화목의 관계, 하나님과의 화목? 나 자신과의 화목? 이웃과의 화목? 모든 사람에게 다 반가운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18절 보세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저 사람은 나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나는 저를 사랑해서 화목합니다.
또 서로, 서로 불화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사이에 들어가서 화목 시킵니다. 내가 있음으로 화목합니다.
나는 Peace naker입니다.
반대로 Trouble naker?
남 사이 좋은데 들어가서 이간 붙이고 꼭 말썽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Peace naker가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 시킨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자기 희생을 통해 화목을 심고 화목을 만들어내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나 중심적이던 사람이 완전히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나 주도적으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그리스도 주도적으로 사는 겁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 된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삶 이런 모습으로 꼭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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