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7일 목장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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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첫째주 목장 나눔입니다.
6월 한 달도 목자님들 수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본문 – 고린도 후서 4장 7 -16절
보통 아기들을 보면 한 살이 넘어가면 말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그 뜻도 모르고 저 나름 말을 하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특히 처음 엄마, 아빠 할 때 그때가 더없이 예쁘지요.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어느 아빠가 너는 고대로 있으라! 거기서 더 이상 크지 마라! 할 수는 없는 거지요.
빨리 커라! 이렇게 말해야지 고대로 있으라 한다면 그런 저주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이는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키도 자라고 생각도 자라가야 합니다.
그런 미래가 아이들 앞에 있습니다.
누워 있다가 앉는 날이 오고 나중에는 걷게 되는 미래가 있다는 겁니다.
이 미래를 알기에 아이가 누워 있다 해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지요? 곧 걷게 되는 미래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먼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부분만 생각하는 사람은 낙심합니다.
반대로 전체 속에 있는 부분을 생각하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작은 일이지만 이 일로 인해 큰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 큰일을 위해서 내가 작은 부분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작은 일에 매여 있지마는 나는 전체를 생각하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이 걷는 길은 성공의 연속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실패의 연속입니다. 많은 실패 속에 삽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 속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이 실패 속에 있다는 겁니다.
때로 재산을 잃어버리면서 믿음을 얻고요.
건강을 잃으면서 지혜를 얻게 되고요.
더욱 중요한 것은 겸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은사인 겸손을 얻게 됩니다.
그런고로 적자, 흑자를 볼때에 언제나 우리는 흑자 편을 생각해야 됩니다.
적자 편을 생각하는 사람은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낙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가시적인 것, 겉만 보는 사람은 낙심합니다. 겉은 자꾸 변하니까요.
그러나 속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낙심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속은 날로,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16절 같이 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도다!
그는 실제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늙어지고 죽어가는 인간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은 날로 새로워지는 도다! 합니다.
새로워지는 도다! 성경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쉽게 말하면 질적인 새것을 말합니다.
즉 영적인 것이요, 지혜에 관한 것이요, 믿음에 관한 것이요, 소망에 관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생명보다 귀한 신령한 세계의 성장을 말합니다.
지혜가 성장합니다. 믿음도 더 순순해집니다.
소망은 점점 영원 지향적이 됩니다. 사랑은 점점 깊어집니다.
여러분의 속 사람, 내면이 그렇게 날마다 더 깊어져 가기를 축복합니다.
또 하나 왜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가?
여기 질그릇이 있습니다.
근데 그 질그릇 안에 보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7절 같이 읽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질그릇이라는 겁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약합니다. 잘 깨어집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확실히 잘 깨어집니다.
조금만 사고가 나면 죽습니다.
변변치 않는 바이러스에 그대로 병들어 죽기도 합니다.
감기라는 것이 별것도 아닌 것 같지만 감기 걸려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육체만 약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도 약합니다.
작은 일에 그만 기분이 나빠지고 혹은 병들어 상심하는 것을 봅니다.
뭘 좀 시작했으면 꾸준히 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약해서 그런 것입니다. 의지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마음도 약하고 또 있습니다.
질그릇이라는 것은 싸구려입니다. 어쨋든 싸구려입니다.
금 그릇, 은그릇, 나무 그릇보다 더 쌉니다
그릇 중에서 제일 싼 것이 질그릇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 별것 아닙니다. 싸구려라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인생을 너무 천하게 생각해서도 안 되지만 그러나 솔직히 말할 것은 인생이 별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별로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는 말씀입니다.
질그릇입니다. 사람은 질그릇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근데 오늘 본문에는 그 속에 보배를 가졌다 합니다.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질그릇은 질그릇인데 그 속에 보배가 담겼습니다.
보배가 담겨 있는 한 이제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질그릇인데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아주 귀한 것입니다. 아주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그 가치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 그러면 속에 있는 그 보배란 무엇입니까?
성경 맥락상으로 말하면 이것은 질그릇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인간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떠날 때 영혼이 떠나면 흙은 흙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질그릇 자체에 대해 우리가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형상이 그 질그릇 속에 있을 때에야 질그릇도 의미가 있는 것이지
보배가 떠난 보배가 없는 질그릇이라는 것은 여전히 흙덩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가 버리면 그만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창세기 6장에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노아 홍수가 있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은 벌써 다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되었습니다. 고기덩이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살아 있는 사람을 놓고도 둘로 나눌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는 영 주도적인 인간, 또 하나는 육 주도적인 인간입니다.
그렇게 다른 것입니다.
영 주도적인 인간? 영이 주도합니다.
육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본능이 나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그 사람의 몸을 육을 지배하고 이끈다는 겁니다.
영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은 그 영이 인도하는 대로 살기에 행복합니다.
즐겁습니다. 찬양하는 것이 즐겁고 기도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여기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몸도 다 거기에 따라갑니다.
예배하니 즐겁고 찬양하니 몸도 즐겁고 건강해지고 그래진다는 것입니다.
근데 육 주도적인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꼭 먹어서 좋은 것은 싫고 먹어서 나쁜 것만 좋아합니다.
해서는 안 될 일만 좋은 겁니다.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은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 한답니다.
아주 악취미이지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면 영혼이 그 인격을 주도하게 되는 그걸 성경이 뭐라 하는가 하면
그 질그릇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합니다.
이게 복 받은 사람입니다.
좀 더 깊이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값을 지불하심으로 우리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자신의 가치는 물러갔고 이제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리스도께서 지불한 값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것이 보배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의 공로가 있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함께 하는 인간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신비롭고 귀한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말씀 8, 9절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을 다 해석할 수는 없고요. 몇 개만 살펴보면요.
여기 답답한 일을 당했다는 말이 나오지요.
이것은 난감한 일을 만났다는 말입니다.
난감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다음 9절 하 반절에 나오는 말씀도 보십시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거꾸러진다!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넘어지자마자 다시 일어선다는 겁니다. 칠전팔기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근데 이 모든 문제를 종합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0절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이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 상 반절 말씀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아주 신비로운 표현입니다. 예수의 죽음?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가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십자가를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십자가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고로 절대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요?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15절이지요.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이 말씀 이해가 되시지요?
이 귀중한 사실을 다시 말하면 질그릇인 내 안에 보배 되신 예수님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그 엄청난 비밀의 진리를 아는 사람? 그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믿고 사는 사람은 계속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되고 그 마음에 은혜가 더욱 넘쳐서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복을 누리는 자로 여러분의 남은 삶 살기를 축원합니다.
6월 한 달도 목자님들 수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본문 – 고린도 후서 4장 7 -16절
보통 아기들을 보면 한 살이 넘어가면 말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그 뜻도 모르고 저 나름 말을 하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특히 처음 엄마, 아빠 할 때 그때가 더없이 예쁘지요.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어느 아빠가 너는 고대로 있으라! 거기서 더 이상 크지 마라! 할 수는 없는 거지요.
빨리 커라! 이렇게 말해야지 고대로 있으라 한다면 그런 저주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이는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키도 자라고 생각도 자라가야 합니다.
그런 미래가 아이들 앞에 있습니다.
누워 있다가 앉는 날이 오고 나중에는 걷게 되는 미래가 있다는 겁니다.
이 미래를 알기에 아이가 누워 있다 해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지요? 곧 걷게 되는 미래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먼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부분만 생각하는 사람은 낙심합니다.
반대로 전체 속에 있는 부분을 생각하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작은 일이지만 이 일로 인해 큰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 큰일을 위해서 내가 작은 부분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작은 일에 매여 있지마는 나는 전체를 생각하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사람이 걷는 길은 성공의 연속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실패의 연속입니다. 많은 실패 속에 삽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 속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이 실패 속에 있다는 겁니다.
때로 재산을 잃어버리면서 믿음을 얻고요.
건강을 잃으면서 지혜를 얻게 되고요.
더욱 중요한 것은 겸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은사인 겸손을 얻게 됩니다.
그런고로 적자, 흑자를 볼때에 언제나 우리는 흑자 편을 생각해야 됩니다.
적자 편을 생각하는 사람은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낙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가시적인 것, 겉만 보는 사람은 낙심합니다. 겉은 자꾸 변하니까요.
그러나 속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낙심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속은 날로,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16절 같이 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도다!
그는 실제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늙어지고 죽어가는 인간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은 날로 새로워지는 도다! 합니다.
새로워지는 도다! 성경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쉽게 말하면 질적인 새것을 말합니다.
즉 영적인 것이요, 지혜에 관한 것이요, 믿음에 관한 것이요, 소망에 관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생명보다 귀한 신령한 세계의 성장을 말합니다.
지혜가 성장합니다. 믿음도 더 순순해집니다.
소망은 점점 영원 지향적이 됩니다. 사랑은 점점 깊어집니다.
여러분의 속 사람, 내면이 그렇게 날마다 더 깊어져 가기를 축복합니다.
또 하나 왜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가?
여기 질그릇이 있습니다.
근데 그 질그릇 안에 보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7절 같이 읽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질그릇이라는 겁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약합니다. 잘 깨어집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확실히 잘 깨어집니다.
조금만 사고가 나면 죽습니다.
변변치 않는 바이러스에 그대로 병들어 죽기도 합니다.
감기라는 것이 별것도 아닌 것 같지만 감기 걸려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육체만 약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도 약합니다.
작은 일에 그만 기분이 나빠지고 혹은 병들어 상심하는 것을 봅니다.
뭘 좀 시작했으면 꾸준히 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약해서 그런 것입니다. 의지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마음도 약하고 또 있습니다.
질그릇이라는 것은 싸구려입니다. 어쨋든 싸구려입니다.
금 그릇, 은그릇, 나무 그릇보다 더 쌉니다
그릇 중에서 제일 싼 것이 질그릇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 별것 아닙니다. 싸구려라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인생을 너무 천하게 생각해서도 안 되지만 그러나 솔직히 말할 것은 인생이 별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별로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는 말씀입니다.
질그릇입니다. 사람은 질그릇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근데 오늘 본문에는 그 속에 보배를 가졌다 합니다.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질그릇은 질그릇인데 그 속에 보배가 담겼습니다.
보배가 담겨 있는 한 이제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질그릇인데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아주 귀한 것입니다. 아주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그 가치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 그러면 속에 있는 그 보배란 무엇입니까?
성경 맥락상으로 말하면 이것은 질그릇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인간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떠날 때 영혼이 떠나면 흙은 흙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질그릇 자체에 대해 우리가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형상이 그 질그릇 속에 있을 때에야 질그릇도 의미가 있는 것이지
보배가 떠난 보배가 없는 질그릇이라는 것은 여전히 흙덩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가 버리면 그만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창세기 6장에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노아 홍수가 있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은 벌써 다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되었습니다. 고기덩이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살아 있는 사람을 놓고도 둘로 나눌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는 영 주도적인 인간, 또 하나는 육 주도적인 인간입니다.
그렇게 다른 것입니다.
영 주도적인 인간? 영이 주도합니다.
육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본능이 나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그 사람의 몸을 육을 지배하고 이끈다는 겁니다.
영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은 그 영이 인도하는 대로 살기에 행복합니다.
즐겁습니다. 찬양하는 것이 즐겁고 기도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여기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몸도 다 거기에 따라갑니다.
예배하니 즐겁고 찬양하니 몸도 즐겁고 건강해지고 그래진다는 것입니다.
근데 육 주도적인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꼭 먹어서 좋은 것은 싫고 먹어서 나쁜 것만 좋아합니다.
해서는 안 될 일만 좋은 겁니다.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은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 한답니다.
아주 악취미이지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면 영혼이 그 인격을 주도하게 되는 그걸 성경이 뭐라 하는가 하면
그 질그릇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합니다.
이게 복 받은 사람입니다.
좀 더 깊이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값을 지불하심으로 우리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자신의 가치는 물러갔고 이제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리스도께서 지불한 값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것이 보배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의 공로가 있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함께 하는 인간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신비롭고 귀한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말씀 8, 9절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을 다 해석할 수는 없고요. 몇 개만 살펴보면요.
여기 답답한 일을 당했다는 말이 나오지요.
이것은 난감한 일을 만났다는 말입니다.
난감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다음 9절 하 반절에 나오는 말씀도 보십시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거꾸러진다!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넘어지자마자 다시 일어선다는 겁니다. 칠전팔기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근데 이 모든 문제를 종합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0절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이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 상 반절 말씀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아주 신비로운 표현입니다. 예수의 죽음?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가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십자가를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십자가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고로 절대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요?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15절이지요.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이 말씀 이해가 되시지요?
이 귀중한 사실을 다시 말하면 질그릇인 내 안에 보배 되신 예수님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그 엄청난 비밀의 진리를 아는 사람? 그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믿고 사는 사람은 계속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되고 그 마음에 은혜가 더욱 넘쳐서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복을 누리는 자로 여러분의 남은 삶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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