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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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님들 감사합니다.
코로나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섬겨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나눔지 뒤에 설교 요약이 있습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제 목 :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본 문 : 고린도전서 3장 16 - 23절(찬송가 438장)
아이스 브레이크 -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라 할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본문요약 -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신자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강조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전으로서의 바른 삶인가를 말씀합니다.
1) 함께 생각할 문제 -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앞에 나오는 말씀들을 보면 육신에 속한자와 신령한 자를 대비해 말합니다. 특히 1절을 읽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서로 나누어 보십시오.
2) 함께 생각할 문제 - 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 주도적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그럼 성령 주도적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3) 함께 생각할 문제 -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내 , 내 마음, 내 영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이 성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위해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 것 같습니까?
4) 함께 기도 - 각자에게 있는 기도제목을 나누시고 기도해주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본문 – 고전 3장 16 - 23절
가만히 보면 출세 지향적인 사람은 출세 하나만 바라봅니다.
정치에 출마하는 사람들 보면 이거 못 고치는 병입니다.
마약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꼭 당선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집착합니다.
그러다 보니 당선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꼴불견입니다. 왜 이래야 되는 겁니까?
공부? 좋은 겁니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에 집착하게 되면 사람이 이상하게 됩니다.
저는 그런 분을 보았습니다. 박사 학위가 세 개나 있습니다.
근데 또 영국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서 영국 여건이 어려운데 왜 가십니까? 물으니 박사 하기 위해서요? 합니다. 아니 박사 학위가 세 개나 있는데 뭘 또 합니까? 묻자 하나 더 해야지요! 합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 사람 나가자 다들 한마디씩 하는데 저 사람, 정신병자다! 그래요.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잃어버리면 안 되고요.
자기 페이스를 잃어버려도 안 됩니다.
무엇이든 너무 지나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습니다마는 1절부터 쭉 보시면 계속 나오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속한 자입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1절을 같이 읽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여기 어린아이는 말도 하지 못하는 아기를 말합니다. 어린아이들 중에서 말이 통하는 아이들은 그래도 좀 나은 편입니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아기들은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기 때문에 무조건 응석을 받아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1절에서 사도 바울이 신령한 자라고 칭하는 사람은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육신에 속한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자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풀고 가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이 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는 겁니다.
그중 하나는 앞장 2장 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하는데 여기 육에 속한 자는 전혀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육신에 속한 자는 분명히 거듭난 성도이기는 한데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은 아직 불신자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쉽게 풀면 유치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즉 예수는 믿는데 신앙 수준이 어린아이와 같이 유치한 수준이라는 겁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밖에 모르지요.
육신에 속한 자는 자기 소원, 자기 집착에 빠진 미숙한 교인이라는 거지요.
반면에 성숙한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구별해야 할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구별할 줄 몰랐습니다. 특별히 신앙의 사람들은 사랑해야 할 것과 사용해야 할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돈은 사랑해야 합니까? 아니면 사용해야 되는 겁니까?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면 결국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정말 우릴 사랑하십니다. 그것도 깊은 사랑을 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형편, 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성숙한 성도입니다.
성숙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근데 고린도 교인들은 이 판단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판단의 기준이 내게 유익이 되는가?
판단 기준이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말씀도 아닙니다.
이렇게 미성숙한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성도는 내가 내 삶의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준입니다. 말씀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선한 고민이 있습니다. 언제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데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 하나님 앞에 설날을 생각하며 오늘을 사는 겁니다. 내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고민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거룩한 기준, 거룩한 고민이 꼭 있기를 축복합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먼저 16절을 보세요.
한 번 더 같이 읽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여러분, 이 말씀은 다른 것을 애기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성령 주도적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서 살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구원받은 것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근데 죄에서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요.
생각 자체도 구원받았습니다. 이성도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이성, 중생한 생각이 될 때 그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한 점 의심이 없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나 자연을 대할 때나 하나님의 품에 안긴 것 같은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 주도적 인간이 되어서 그런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사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 이런 분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내 이성을 지배하고 내
생각을 지배합니다.
이게 참 신자라는 것입니다.
근데 동물성이 이성을 지배하고 동물적 욕망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게 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도 하나님의 세계도 보이지 않고 오직 나만 보입니다. 이런 사람의 삶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잘 봐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성전이라는 단어를 쓰지요.
원래 성전이라 할 때 지성소와 성소를 말합니다.
제일 안쪽에 지성소가 있는데 이곳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있습니다. 여기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합니다.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일 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들어갈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게 없이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인간은 모두 다 죄인이기에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 지성소 바로 앞에 성소가 있습니다.
이 성소는 제사장들이 들어가 제사를 드리는 곳이지요.
나머지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하면 성전 뜰입니다.
성전 뜰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서서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좋은 자리에 앉아서 편안히 예배드립니다마는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마당에서 드립니다. 뜰 안마당에 서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겁니다.
실은 우리도 서서 예배드려야 하는데? 그게 맞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거니까요.
지금 이 자리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거지요.
여러분, 중요한 것은 앉아서 드리는가? 서서 드리는가?
그게 아니고요. 얼마나 하나님을 의식하며 예배하는가?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임재 의식을 가지고 예배하는가?
그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으로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송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전 이야기를 좀 더 하면요.
아무리 성소가 화려해도 지성소 없는 성소는 성소가 아닙니다.
이게 무슨 밀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뜰이라는 것도 그렇고 성소라는 것도 그렇고 그 뒤에 지성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있기 때문에 성소가 성소 되는 것이고요. 성전 뜰이 성전 뜰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에 의미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화려한 성전이라 하더라도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 있고 우리 생각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지성소가 있어야 성소가 성소가 되고 또 성전이 성전이 되는 것처럼 우리 깊은 곳에 영적 존재,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이 살아 있을 때에만 참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의 말씀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같이 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여러분, 먹는 것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가짐 그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아무 말이나 막 하면 안 됩니다.
그럼 성령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럼 피폐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내 몸, 내 마음, 내 영,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항상 이 성전을 성령으로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고 주님의 얼굴을 뵈며 살아가는 여러분의 남은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코로나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섬겨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나눔지 뒤에 설교 요약이 있습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제 목 :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본 문 : 고린도전서 3장 16 - 23절(찬송가 438장)
아이스 브레이크 -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라 할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본문요약 -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신자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강조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전으로서의 바른 삶인가를 말씀합니다.
1) 함께 생각할 문제 -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앞에 나오는 말씀들을 보면 육신에 속한자와 신령한 자를 대비해 말합니다. 특히 1절을 읽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서로 나누어 보십시오.
2) 함께 생각할 문제 - 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 주도적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그럼 성령 주도적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3) 함께 생각할 문제 -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내 , 내 마음, 내 영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이 성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위해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 것 같습니까?
4) 함께 기도 - 각자에게 있는 기도제목을 나누시고 기도해주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본문 – 고전 3장 16 - 23절
가만히 보면 출세 지향적인 사람은 출세 하나만 바라봅니다.
정치에 출마하는 사람들 보면 이거 못 고치는 병입니다.
마약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꼭 당선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집착합니다.
그러다 보니 당선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꼴불견입니다. 왜 이래야 되는 겁니까?
공부? 좋은 겁니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에 집착하게 되면 사람이 이상하게 됩니다.
저는 그런 분을 보았습니다. 박사 학위가 세 개나 있습니다.
근데 또 영국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서 영국 여건이 어려운데 왜 가십니까? 물으니 박사 하기 위해서요? 합니다. 아니 박사 학위가 세 개나 있는데 뭘 또 합니까? 묻자 하나 더 해야지요! 합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 사람 나가자 다들 한마디씩 하는데 저 사람, 정신병자다! 그래요.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잃어버리면 안 되고요.
자기 페이스를 잃어버려도 안 됩니다.
무엇이든 너무 지나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습니다마는 1절부터 쭉 보시면 계속 나오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속한 자입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1절을 같이 읽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여기 어린아이는 말도 하지 못하는 아기를 말합니다. 어린아이들 중에서 말이 통하는 아이들은 그래도 좀 나은 편입니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아기들은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기 때문에 무조건 응석을 받아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1절에서 사도 바울이 신령한 자라고 칭하는 사람은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육신에 속한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자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풀고 가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이 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는 겁니다.
그중 하나는 앞장 2장 14절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하는데 여기 육에 속한 자는 전혀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육신에 속한 자는 분명히 거듭난 성도이기는 한데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은 아직 불신자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쉽게 풀면 유치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즉 예수는 믿는데 신앙 수준이 어린아이와 같이 유치한 수준이라는 겁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밖에 모르지요.
육신에 속한 자는 자기 소원, 자기 집착에 빠진 미숙한 교인이라는 거지요.
반면에 성숙한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구별해야 할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구별할 줄 몰랐습니다. 특별히 신앙의 사람들은 사랑해야 할 것과 사용해야 할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돈은 사랑해야 합니까? 아니면 사용해야 되는 겁니까?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면 결국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정말 우릴 사랑하십니다. 그것도 깊은 사랑을 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형편, 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성숙한 성도입니다.
성숙은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근데 고린도 교인들은 이 판단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판단의 기준이 내게 유익이 되는가?
판단 기준이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말씀도 아닙니다.
이렇게 미성숙한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성도는 내가 내 삶의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준입니다. 말씀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선한 고민이 있습니다. 언제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데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 하나님 앞에 설날을 생각하며 오늘을 사는 겁니다. 내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고민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거룩한 기준, 거룩한 고민이 꼭 있기를 축복합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먼저 16절을 보세요.
한 번 더 같이 읽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여러분, 이 말씀은 다른 것을 애기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성령 주도적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서 살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구원받은 것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근데 죄에서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요.
생각 자체도 구원받았습니다. 이성도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이성, 중생한 생각이 될 때 그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한 점 의심이 없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나 자연을 대할 때나 하나님의 품에 안긴 것 같은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 주도적 인간이 되어서 그런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사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 이런 분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내 이성을 지배하고 내
생각을 지배합니다.
이게 참 신자라는 것입니다.
근데 동물성이 이성을 지배하고 동물적 욕망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게 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도 하나님의 세계도 보이지 않고 오직 나만 보입니다. 이런 사람의 삶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잘 봐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성전이라는 단어를 쓰지요.
원래 성전이라 할 때 지성소와 성소를 말합니다.
제일 안쪽에 지성소가 있는데 이곳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있습니다. 여기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합니다.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일 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들어갈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게 없이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인간은 모두 다 죄인이기에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 지성소 바로 앞에 성소가 있습니다.
이 성소는 제사장들이 들어가 제사를 드리는 곳이지요.
나머지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하면 성전 뜰입니다.
성전 뜰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서서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좋은 자리에 앉아서 편안히 예배드립니다마는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마당에서 드립니다. 뜰 안마당에 서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겁니다.
실은 우리도 서서 예배드려야 하는데? 그게 맞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거니까요.
지금 이 자리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거지요.
여러분, 중요한 것은 앉아서 드리는가? 서서 드리는가?
그게 아니고요. 얼마나 하나님을 의식하며 예배하는가?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임재 의식을 가지고 예배하는가?
그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으로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송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전 이야기를 좀 더 하면요.
아무리 성소가 화려해도 지성소 없는 성소는 성소가 아닙니다.
이게 무슨 밀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뜰이라는 것도 그렇고 성소라는 것도 그렇고 그 뒤에 지성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있기 때문에 성소가 성소 되는 것이고요. 성전 뜰이 성전 뜰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에 의미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화려한 성전이라 하더라도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 있고 우리 생각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지성소가 있어야 성소가 성소가 되고 또 성전이 성전이 되는 것처럼 우리 깊은 곳에 영적 존재,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이 살아 있을 때에만 참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의 말씀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같이 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여러분, 먹는 것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가짐 그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아무 말이나 막 하면 안 됩니다.
그럼 성령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럼 피폐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내 몸, 내 마음, 내 영,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항상 이 성전을 성령으로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고 주님의 얼굴을 뵈며 살아가는 여러분의 남은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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