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5일 목장 나눔
페이지 정보

본문
우리 목자님들? 부활의 소망 능력이 이 번 한 주간 넘치기를 바랍니다.
축복합니다.
예수 부활이 언제나 우리의 소망입니다!
본문 - 누가 24 : 1 -12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이겨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비우세요? 하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나를 비우고 나를 이기는 것이 내 힘으로 됩니까? 안 됩니다.
불가능함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이건 십자가를 쳐다볼 때 더 나아가서 십자가의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경험할 때 가능한 겁니다.
이 땅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평양에 김익두라는 건달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평양 장터에 나갔다가 그날 김익두를 만나지 않고 돌아오면 그날은 재수 좋은 날이라 할 정도로 소문난 건달이었습니다.
술을 먹고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릴 뿐만 아니라 돈을 뺏기도 하는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꼴 보기 싫어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느 날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건달 김익두가 성도 김익두가 되고 나중에는 평양 신학교를 졸업해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김익두야말로 한국 교회에 있어 마치 2000년 전 핍박자, 바울과 같은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이 김 익두씨가 처음 예수 믿고 초 신자였을 때 이분이 너무 감격해서 자기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 놀라워서 이런 일을 했습니다.
지인들에게 자기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보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부고장을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짐작건대 그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뻐했을 겁니다.
야, 이제 시장에서 그 인간을 안 봐도 되는구나!
그러나 김익두는 진짜 죽은 게 아니었습니다. 살아 있었습니다.
김익두가 성경책을 끼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딴 사람이었습니다.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 입에서 점점 이런 말들이 퍼져나갔습니다.
김익두가 옛날 건달 김익두가 아니다! 변했다! 완전히 딴사람이 됐다! 진짜 건달 김익두는 죽었다!
그러던 차에 옛날에 어떤 원한이 있었던지 성도가 된 이 김익두에게 어떤 사람이 욕을 퍼부어대면서 똥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씌우는 일이 있었습니다.
김익두가 아무리 예수를 믿었다고 하지만 아직 신자로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이 초신자, 김익두가 어떻게 반응한 줄 아십니까? 김익두가 죽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오늘 너가 죽었다!
여러분, 예수를 20년, 30년을 믿고도 이런 모습이 나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압니다. 근데 초 신자, 김익두입니다. 얼마나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둘도 없는 건달이었던 김익두가 이렇게 놀라운 말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김익두가 살았습니까? 아니면 죽었습니까? 정말 죽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 옛사람도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다! 애기합니다.
그 옛사람이 누구입니까? 지옥 갈 나? 죄가 뭔지도 모르고 살던 나?
하나님 없다! 하며 자기만을 위해 교만하게 살던 나입니다.
그 옛 자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할 때 새로운 김익두? 새로운 두인균? 새로운 이 아무개? 김 아무개가 태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애기입니다.
김익두는 정확하게 이 부활의 복음의 메시지를 알았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이 메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가 말하는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그런 은혜의 체험이 꼭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이 누가복음 24장은 주님이 우리에게 부활을 가르치면서 특별히 강조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부활을 한 명도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1절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실은 저도 어릴 때 교회를 다니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건 말이 안 된다? 하는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예수님의 남자 제자들뿐만 아니라 여자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1절부터 쭉 보십시오.
거기 보면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잘 따랐던 여 성도들이 나오지요.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 향 품입니다.
그 향 품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한 것입니다.
즉 그들은 죽은 예수께 향 품을 바르며 존경을 표시하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무덤을 향해 가는 거지요. 가면서 걱정이 많았을 것입니다.
동굴을 막고 있는 돌문은 어떻게 열 것인가?
그 무덤을 지키는 파수꾼들에게는 뭐라 말할 것인가?
근데 가보니 파수꾼이 없는 겁니다.
돌문도 누가 옮겼는지 이미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이때라도 부활에 대한 설교를 여러 번 들었으니 그걸 기억하고 예수님이 진짜 살아나셨구나? 이렇게 생각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무덤 속에 들어가 시신이 없어진 것을 걱정만 하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왜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를 찾느냐?
그 말을 듣고서야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셨구나! 하며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달려가 부활을 알리는 첫 메신저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그 당시 성도들 사이에 영적 커뮤니케이션이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명확하게 수차례 말씀하셨고 심지어 보여주고 했음에도 보여주고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는데 오랜시간이 걸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디까지 오셨습니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에 대해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참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러면서 오늘 이 예배에 오셨습니까?
혹시 그런 분들이 있다면 오늘 그 마음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요즘 난독증 환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 난독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상대방의 애기를 잘못 알아듣고 상대방의 의사를 혼동할 때가 많은 사람을 난독증 환자가 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모임에서 야유회를 가는데 다음달 언제 출발합니다! 했습니다.
근데 그 출발날짜를 이번 달로 이해하는 겁니다.
또 상대방이 4월 달에 한번 만나자고 애기했는데 그 4월을 날로 생각하고 4일이라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는 난독증은 아니고요.
심한 스트레스가 있어 일시적으로 생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과 함께 살려 할 때 정말 답답함을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듯 하나님이 우리에게 엄청난 소식을 전하는데 통 알아듣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예 관심이 없거나 관심이 있어 이 예배의 자리까지 왔지만 예수 부활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신의 삶에 적용이 안 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내 머리로 하나님을 재면 안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 내가 가지고 있는 얄팍한 이해력을 가지고 그 엄청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면 여러분, 정말 이해가 되는 것만을 믿고 사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구에 붙어 있는 것이 이해가 되어서 지구에 붙어 살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조금만한 상식과 이해력으로 하나님을 재려 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무조건 믿으라!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우리를 복종시키는 분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여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해가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는 믿음으로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영국의 목공소에서 일하던 가난한 한 청년이 친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그에게 인생의 소망과 의욕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한 10년 열심히 일하고 난 다음에 그는 드디어 가구 제조업체를 경영하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어제 돈도 명예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자기 공장 뒷면에 있는 언덕에 올라 산책하다가 널찍한 바위를 발견하고 걸터앉아 아름다운 마을의 절경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는 가슴에 밀려오는 행복감을 느끼며 그가 이런 작은 행복을 누리는 것은 자기가 걸터앉은 바위가 자신을 편안히 받쳐주고 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떠받쳐 주는 바위와 같은 존재가 바로 예수님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행복의 근거가 돈도 아니요! 명예도 아니요!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셔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예수님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꺼내 시를 적기 시작합니다.
이 시가 바로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이 몸의 소망 무언가!입니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은 에드워드 모트입니다.
그가 지은 가사를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까?
그 주님이 우릴 만나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흔들릴 수 없는 소망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유언과 같은 말씀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함께 하심?
이것만이 우리의 가장 진정한 희망이요, 소망의 이유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이기셨습니다. 죽음의 권세까지 이기셨습니다.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분을 오늘 여러분의 주님으로 만나는 은혜가 꼭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 전서를 보면 고린도 교회에는 엄청난 문제가 있었습니다. 파벌이 있었습니다. 분쟁이 있었습니다.
성도들 간에 고소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진노를 선포하지도 않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를 지적하면서 13장에서 사랑을 선포합니다. 15장에 가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
우리 개개인이 세상을 살면서 있게 되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주어진 분이십니다.
이 부활을 믿을 때 우리에게 있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진짜 문제는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여러분에게 있는가입니다.
이게 항상 문제이지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항상 문제는 우리 자신이라는 겁니다.
우리 자신에게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든 절망하지 마시고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의 사람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복합니다.
예수 부활이 언제나 우리의 소망입니다!
본문 - 누가 24 : 1 -12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이겨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비우세요? 하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나를 비우고 나를 이기는 것이 내 힘으로 됩니까? 안 됩니다.
불가능함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이건 십자가를 쳐다볼 때 더 나아가서 십자가의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경험할 때 가능한 겁니다.
이 땅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평양에 김익두라는 건달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평양 장터에 나갔다가 그날 김익두를 만나지 않고 돌아오면 그날은 재수 좋은 날이라 할 정도로 소문난 건달이었습니다.
술을 먹고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릴 뿐만 아니라 돈을 뺏기도 하는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꼴 보기 싫어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느 날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건달 김익두가 성도 김익두가 되고 나중에는 평양 신학교를 졸업해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김익두야말로 한국 교회에 있어 마치 2000년 전 핍박자, 바울과 같은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이 김 익두씨가 처음 예수 믿고 초 신자였을 때 이분이 너무 감격해서 자기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 놀라워서 이런 일을 했습니다.
지인들에게 자기가 죽었다는 부고장을 보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부고장을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짐작건대 그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뻐했을 겁니다.
야, 이제 시장에서 그 인간을 안 봐도 되는구나!
그러나 김익두는 진짜 죽은 게 아니었습니다. 살아 있었습니다.
김익두가 성경책을 끼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딴 사람이었습니다.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 입에서 점점 이런 말들이 퍼져나갔습니다.
김익두가 옛날 건달 김익두가 아니다! 변했다! 완전히 딴사람이 됐다! 진짜 건달 김익두는 죽었다!
그러던 차에 옛날에 어떤 원한이 있었던지 성도가 된 이 김익두에게 어떤 사람이 욕을 퍼부어대면서 똥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씌우는 일이 있었습니다.
김익두가 아무리 예수를 믿었다고 하지만 아직 신자로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이 초신자, 김익두가 어떻게 반응한 줄 아십니까? 김익두가 죽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오늘 너가 죽었다!
여러분, 예수를 20년, 30년을 믿고도 이런 모습이 나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압니다. 근데 초 신자, 김익두입니다. 얼마나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둘도 없는 건달이었던 김익두가 이렇게 놀라운 말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김익두가 살았습니까? 아니면 죽었습니까? 정말 죽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 옛사람도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다! 애기합니다.
그 옛사람이 누구입니까? 지옥 갈 나? 죄가 뭔지도 모르고 살던 나?
하나님 없다! 하며 자기만을 위해 교만하게 살던 나입니다.
그 옛 자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할 때 새로운 김익두? 새로운 두인균? 새로운 이 아무개? 김 아무개가 태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애기입니다.
김익두는 정확하게 이 부활의 복음의 메시지를 알았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이 메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가 말하는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그런 은혜의 체험이 꼭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이 누가복음 24장은 주님이 우리에게 부활을 가르치면서 특별히 강조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부활을 한 명도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1절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실은 저도 어릴 때 교회를 다니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건 말이 안 된다? 하는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예수님의 남자 제자들뿐만 아니라 여자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1절부터 쭉 보십시오.
거기 보면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잘 따랐던 여 성도들이 나오지요.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 향 품입니다.
그 향 품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한 것입니다.
즉 그들은 죽은 예수께 향 품을 바르며 존경을 표시하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무덤을 향해 가는 거지요. 가면서 걱정이 많았을 것입니다.
동굴을 막고 있는 돌문은 어떻게 열 것인가?
그 무덤을 지키는 파수꾼들에게는 뭐라 말할 것인가?
근데 가보니 파수꾼이 없는 겁니다.
돌문도 누가 옮겼는지 이미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이때라도 부활에 대한 설교를 여러 번 들었으니 그걸 기억하고 예수님이 진짜 살아나셨구나? 이렇게 생각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무덤 속에 들어가 시신이 없어진 것을 걱정만 하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왜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를 찾느냐?
그 말을 듣고서야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셨구나! 하며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달려가 부활을 알리는 첫 메신저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그 당시 성도들 사이에 영적 커뮤니케이션이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명확하게 수차례 말씀하셨고 심지어 보여주고 했음에도 보여주고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는데 오랜시간이 걸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디까지 오셨습니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에 대해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참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러면서 오늘 이 예배에 오셨습니까?
혹시 그런 분들이 있다면 오늘 그 마음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요즘 난독증 환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 난독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상대방의 애기를 잘못 알아듣고 상대방의 의사를 혼동할 때가 많은 사람을 난독증 환자가 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모임에서 야유회를 가는데 다음달 언제 출발합니다! 했습니다.
근데 그 출발날짜를 이번 달로 이해하는 겁니다.
또 상대방이 4월 달에 한번 만나자고 애기했는데 그 4월을 날로 생각하고 4일이라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는 난독증은 아니고요.
심한 스트레스가 있어 일시적으로 생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과 함께 살려 할 때 정말 답답함을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듯 하나님이 우리에게 엄청난 소식을 전하는데 통 알아듣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예 관심이 없거나 관심이 있어 이 예배의 자리까지 왔지만 예수 부활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신의 삶에 적용이 안 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내 머리로 하나님을 재면 안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 내가 가지고 있는 얄팍한 이해력을 가지고 그 엄청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렇다면 여러분, 정말 이해가 되는 것만을 믿고 사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구에 붙어 있는 것이 이해가 되어서 지구에 붙어 살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조금만한 상식과 이해력으로 하나님을 재려 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무조건 믿으라!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우리를 복종시키는 분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여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해가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는 믿음으로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영국의 목공소에서 일하던 가난한 한 청년이 친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그에게 인생의 소망과 의욕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한 10년 열심히 일하고 난 다음에 그는 드디어 가구 제조업체를 경영하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어제 돈도 명예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자기 공장 뒷면에 있는 언덕에 올라 산책하다가 널찍한 바위를 발견하고 걸터앉아 아름다운 마을의 절경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는 가슴에 밀려오는 행복감을 느끼며 그가 이런 작은 행복을 누리는 것은 자기가 걸터앉은 바위가 자신을 편안히 받쳐주고 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떠받쳐 주는 바위와 같은 존재가 바로 예수님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행복의 근거가 돈도 아니요! 명예도 아니요!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셔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예수님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꺼내 시를 적기 시작합니다.
이 시가 바로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이 몸의 소망 무언가!입니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은 에드워드 모트입니다.
그가 지은 가사를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까?
그 주님이 우릴 만나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흔들릴 수 없는 소망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유언과 같은 말씀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함께 하심?
이것만이 우리의 가장 진정한 희망이요, 소망의 이유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이기셨습니다. 죽음의 권세까지 이기셨습니다.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분을 오늘 여러분의 주님으로 만나는 은혜가 꼭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 전서를 보면 고린도 교회에는 엄청난 문제가 있었습니다. 파벌이 있었습니다. 분쟁이 있었습니다.
성도들 간에 고소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진노를 선포하지도 않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를 지적하면서 13장에서 사랑을 선포합니다. 15장에 가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
우리 개개인이 세상을 살면서 있게 되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주어진 분이십니다.
이 부활을 믿을 때 우리에게 있는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진짜 문제는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여러분에게 있는가입니다.
이게 항상 문제이지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항상 문제는 우리 자신이라는 겁니다.
우리 자신에게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든 절망하지 마시고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의 사람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다음글4월 11일 목장 나눔 25.04.0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