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1일 목장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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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도 목자님들 주안에서 화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오직 예수뿐입니다!
본문 – 누가 10장 25 - 37절
여러분은 사람을 볼 때 어디를 먼저 보십니까? 사람은 먼저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웃을 보아도 안 되고 신을 보아서도 안 되고 유행하는 언어처럼 헤어 스타일이나 몸매를 보아서도 안 됩니다.
사람의 얼굴? 얼굴 중에서도 특히 눈을 보아야 합니다.
눈을 보지 못했다면 그 사람을 보았다고 하면 안 되고요. 더 보려고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바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대할 때는 먼저 중심인 얼굴을 본 후에라야 지엽적인 관심거리가 될 수 있는 옷이나 생김새 등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중심부터 보고 그 중심에 의해서 지엽적인 면이 관찰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 겁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성경을 볼 때 반드시 중심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럼 성경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디를 보아도 예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 제사를 드리는 장면을 대할 때에도 예수를 보아야 하고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이야기?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드리는 장면을 보면서도 예수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는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사건에서 여호와 이레?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린양? 예수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니까 그 사건이 중요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사건에서 예수를 찾아야 하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가 성경을 대하고자 할 때 예수의 얼굴을 가장 환히 비추어주는 것이 복음서라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을 하나의 몸으로 비유해서 본다면 성경의 얼굴은 바로 복음서입니다.
근데 이단들은 하나 같이 복음서를 소홀히 여깁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느 이단이라도 연구해 보면 복음서를 멀리할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러고는 요한 계시록, 다니엘서, 에스겔서 등에 관심을 쏟으며 이상한 말을 하는데 이것은 거의 이단들입니다.
그것은 다음에 보아도 되는 것들입니다.
이처럼 복음서를 통해 성경 전체를 종합해 볼 수 있는 까닭에 성경의 중심이 복음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도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애기를 주로 비유로 말씀하셨고 천국에 대한 설명도 비유로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 중 가장 중요한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비유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을 잘 보십시오.
오늘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도 선한 사람으로 살자는 것이 핵심 내용이 아닙니다.
이 비유 역시 중심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그런가?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을 잘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25절에 잘 나오지요.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비유가 나오게 된 배경이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음으로 시작되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율법에 능통한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서는 뭐라 하더냐? 하시며 다시 묻습니다.
그랬더니 27절에 보면 그 율법사가 훌륭하게도 신명기 6장의 쉐마로 율법을 잘 요약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주 대답을 잘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너의 대답이 옳으니 이를 행하라 하십니다.
자 여러분, 여기까지만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의 몫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잘하면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커다란 반전이 있습니다.
그 율법사가 이 질문을 하게 된 계기가 뭔가? 29절에 잘 나타나지요.
같이 29절 읽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러니까 자신은 그 일을 충분히 잘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누가 내 이웃입니까? 하고 물은 것입니다.
누가 이웃인지 말만 해 주면 다 사랑해 버리고 말겠다는 기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영생의 본질을 설명해 주시는 겁니다.
한 마디로 너가 진짜 누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질문에 담긴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고
그렇게 산다고 자부하는 율법 교사에게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너가 바로 그런 은혜와 긍휼을 입어야 할 강도 만난 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심지어 율법 교사? 너는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어 있는 상태라는 거지요.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 상태가 바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상태인 겁니다.
강도 만나 거의 반 죽어 있는 자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자라는 걸 상기해 보면
그 강도 만난 자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라는 강도에게 속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죽어 있는 상태에 있는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그건 율법과 제사로는 하나님을 잃고 거의 반 죽은 상태인 강도 만난 자를 절대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이것입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율법과 제사 즉 행위는 강도 만난 자를 절대 도울 수 없다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 지킴이 즉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사람의 행위에서 생산되어 나올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한 자에게 누가 다가옵니까?
예, 사마리아인입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개 취급도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어느 정도인가? 유대인들이 장사가 너무 안되어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라 해도 그들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을 정도입니다.
근데 그런 강퍅한 땅에 율법주의의 이방인이자 유대주의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분은 누굴 가리킵니까? 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기들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서는 거의 반 죽어가는 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 형식적인 율법과 제사의 땅에 진짜 선한 이방인이 그 땅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자기 맘대로 사는 자들을 자기의 목숨을 걸고 살려내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영생이며 그게 바로 구원임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본주의 땅?
죄인들의 땅? 율법주의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삶?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원수인 강도 만난 자를 구원하러 오신 이 세상의 이방인?
선한 예수가 바로 그 사마리아인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면 크게 아멘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거의 반 죽어 이 세상의 어떤 힘도 의지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만을 의지하여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로 지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그게 영생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내 뜻, 내 야망, 내 주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근데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 우리를 우리 신앙생활을 통해 거의 반죽이고 계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살라고요. 이 세상의 삶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그 능력으로 살라고요.
자신이 원래 강도 만난 자라는 것을?
선한 사마리아인 즉 예수 그리스도의 도와주심의 은혜가 없었다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더 나아가 앞으로의 삶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자인 것을 확실하게 깨닫는 은혜가 오늘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사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방불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티끌처럼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펄떡펄떡 뛰는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은 거의 반 죽이십니다.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이며 이 땅에서 나타나는 성도의 영생의 삶입니다.
실망 되십니까? 그걸 거부하시면 안 됩니다.
오랜 시간? 허비하는 돌고 도는 신앙생활이 되실 겁니다.
여러분의 남은 삶 날 살리시고 치유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인하여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하고 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심으로 가정과 교회 공동체를 살찌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 다 되기를 축복합니다.
찬양 – 오직 예수뿐이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오직 예수뿐입니다!
본문 – 누가 10장 25 - 37절
여러분은 사람을 볼 때 어디를 먼저 보십니까? 사람은 먼저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웃을 보아도 안 되고 신을 보아서도 안 되고 유행하는 언어처럼 헤어 스타일이나 몸매를 보아서도 안 됩니다.
사람의 얼굴? 얼굴 중에서도 특히 눈을 보아야 합니다.
눈을 보지 못했다면 그 사람을 보았다고 하면 안 되고요. 더 보려고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바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대할 때는 먼저 중심인 얼굴을 본 후에라야 지엽적인 관심거리가 될 수 있는 옷이나 생김새 등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중심부터 보고 그 중심에 의해서 지엽적인 면이 관찰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 겁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성경을 볼 때 반드시 중심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럼 성경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디를 보아도 예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 제사를 드리는 장면을 대할 때에도 예수를 보아야 하고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이야기?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드리는 장면을 보면서도 예수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는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사건에서 여호와 이레?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린양? 예수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니까 그 사건이 중요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사건에서 예수를 찾아야 하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가 성경을 대하고자 할 때 예수의 얼굴을 가장 환히 비추어주는 것이 복음서라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을 하나의 몸으로 비유해서 본다면 성경의 얼굴은 바로 복음서입니다.
근데 이단들은 하나 같이 복음서를 소홀히 여깁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느 이단이라도 연구해 보면 복음서를 멀리할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러고는 요한 계시록, 다니엘서, 에스겔서 등에 관심을 쏟으며 이상한 말을 하는데 이것은 거의 이단들입니다.
그것은 다음에 보아도 되는 것들입니다.
이처럼 복음서를 통해 성경 전체를 종합해 볼 수 있는 까닭에 성경의 중심이 복음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도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애기를 주로 비유로 말씀하셨고 천국에 대한 설명도 비유로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 중 가장 중요한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비유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을 잘 보십시오.
오늘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도 선한 사람으로 살자는 것이 핵심 내용이 아닙니다.
이 비유 역시 중심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그런가?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을 잘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25절에 잘 나오지요.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비유가 나오게 된 배경이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음으로 시작되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율법에 능통한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서는 뭐라 하더냐? 하시며 다시 묻습니다.
그랬더니 27절에 보면 그 율법사가 훌륭하게도 신명기 6장의 쉐마로 율법을 잘 요약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주 대답을 잘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너의 대답이 옳으니 이를 행하라 하십니다.
자 여러분, 여기까지만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의 몫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잘하면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커다란 반전이 있습니다.
그 율법사가 이 질문을 하게 된 계기가 뭔가? 29절에 잘 나타나지요.
같이 29절 읽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러니까 자신은 그 일을 충분히 잘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누가 내 이웃입니까? 하고 물은 것입니다.
누가 이웃인지 말만 해 주면 다 사랑해 버리고 말겠다는 기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영생의 본질을 설명해 주시는 겁니다.
한 마디로 너가 진짜 누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질문에 담긴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고
그렇게 산다고 자부하는 율법 교사에게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너가 바로 그런 은혜와 긍휼을 입어야 할 강도 만난 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심지어 율법 교사? 너는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어 있는 상태라는 거지요.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 상태가 바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상태인 겁니다.
강도 만나 거의 반 죽어 있는 자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자라는 걸 상기해 보면
그 강도 만난 자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라는 강도에게 속아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죽어 있는 상태에 있는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그건 율법과 제사로는 하나님을 잃고 거의 반 죽은 상태인 강도 만난 자를 절대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이것입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율법과 제사 즉 행위는 강도 만난 자를 절대 도울 수 없다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 지킴이 즉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사람의 행위에서 생산되어 나올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한 자에게 누가 다가옵니까?
예, 사마리아인입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개 취급도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어느 정도인가? 유대인들이 장사가 너무 안되어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라 해도 그들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을 정도입니다.
근데 그런 강퍅한 땅에 율법주의의 이방인이자 유대주의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분은 누굴 가리킵니까? 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기들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서는 거의 반 죽어가는 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 형식적인 율법과 제사의 땅에 진짜 선한 이방인이 그 땅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자기 맘대로 사는 자들을 자기의 목숨을 걸고 살려내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영생이며 그게 바로 구원임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본주의 땅?
죄인들의 땅? 율법주의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삶?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원수인 강도 만난 자를 구원하러 오신 이 세상의 이방인?
선한 예수가 바로 그 사마리아인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면 크게 아멘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거의 반 죽어 이 세상의 어떤 힘도 의지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만을 의지하여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로 지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그게 영생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내 뜻, 내 야망, 내 주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근데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 우리를 우리 신앙생활을 통해 거의 반죽이고 계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살라고요. 이 세상의 삶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그 능력으로 살라고요.
자신이 원래 강도 만난 자라는 것을?
선한 사마리아인 즉 예수 그리스도의 도와주심의 은혜가 없었다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더 나아가 앞으로의 삶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자인 것을 확실하게 깨닫는 은혜가 오늘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사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방불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티끌처럼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펄떡펄떡 뛰는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은 거의 반 죽이십니다.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이며 이 땅에서 나타나는 성도의 영생의 삶입니다.
실망 되십니까? 그걸 거부하시면 안 됩니다.
오랜 시간? 허비하는 돌고 도는 신앙생활이 되실 겁니다.
여러분의 남은 삶 날 살리시고 치유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인하여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하고 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심으로 가정과 교회 공동체를 살찌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 다 되기를 축복합니다.
찬양 – 오직 예수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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