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둘째주 목장 나눔 - 십자가의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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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둘째주 목장나눔입니다.
행복축제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목장에서도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십자가의 사람으로!
본문 – 고전 1장 10 -24절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정말로 예쁜 여자는 세수하지 아니한 얼굴을 남편에게 보이지 않는다!
여자가 남편을 위해서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가령 아무리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라 하더라도 밤새 자고 난 다음에 머리는 막 흐트려져서 북데기 같고
침을 흘려 볼에 자국이 나 있는데 거기에다 대고 I love you가 나오겠습니까? 감성적으로 말입니다.
사랑은 의지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흔히 정이니 뭐니 합니다만 사랑은 어디까지나 의지인 것입니다.
사랑으로 보는 겁니다. 사랑하고 보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에 계속 끌려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답게 봐주는 겁니다. 이래서 사랑도 믿음도 의지인 겁니다.
근데도 기분대로 사랑할 것입니까? 지능대로 사랑할 것입니까?
모름지기 의지로 사랑할 겁니다.
종교개혁이니 정치 개혁이니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 개혁입니다.
자기 개혁 없는 종교개혁, 사회 개혁이니 뭐니 하니까 세상이 더 혼탁하고 더 시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자기 개혁이 먼저입니다. 개혁이란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적이 아닌 것?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잘못된 것들을 다 제해 버리고 본디로 돌아가고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그래야 개혁입니다. 개혁이란 변화를 말합니다.
근데 이것은 의식적인 변화, 의지적인 변화, 새로워지는 변화입니다.
문제는 이 변화의 힘입니다. 이 변화의 의지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먼저 10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여기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그것은 상 반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한다 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목사의 이름이 아닙니다. 장로의 이름도 아닙니다. 권사의 이름도 집사의 이름도 아닙니다.
누구의 이름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한다! 이 말은 그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위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가장 높임을 받아야 하고요.
그분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교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가 아닙니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를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교회는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우리가 공동체를 이룬 곳입니다.
근데 고린도 교회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지 못해 지체들이 분열된 상황입니다.
근데 교회에서 이렇게 지체들끼리 분열하고 싸우는 이유를 보면 누가 틀려서가 아니라 내가 옳아서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의 옳음보다 내 옳음이 더 중요해집니다.
몇 년 전에 저희 노회에 속한 교회에 큰 분쟁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노회 서기였습니다. 노회장 했던 목사님이 그 교회 문제로 판사에게 불려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판사가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교회 안에서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면 누구도 말릴 재간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나 술 한 잔 마시면서 해결이 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양쪽 다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하며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과연 똑같은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이 맞습니까?
설령 내가 옳았고 싸움에서 이겼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승리라면 그것이 옳은 승리일까요?
무조건 양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교회는 뭘 잘하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의 몸을 세우는 곳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집중하지 않고 잘하려고만 하면 싸우게 되고요.
그러면 어느 기준이나 법이 우상이 되고 마는 겁니다. 12절 말씀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이 말씀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가 배운 사람 혹은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에 따라서 바울파, 아불로 파, 게바파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그 당시 유행했던 진리 전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신앙인이 되는 것을 유명한 교사로부터 진리를 전수받는 것으로 오해했고
또 서로 대립하는 학파 사이에 끊임없이 경쟁함으로 서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단순한 지적 가르침이나 배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삶을 바꾸는 것이며 내 힘 대신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어떤 학파를 조성해서 연구 논문을 계속해서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함께하며 말씀을 나누고 서로 필요한 은사들을 주고받으며 함께 자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새 나의 눈을 가리고 있던 편견의 껍질이 벗겨지면서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어집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애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불순종하고 자기만을 주장하는 무서운 죄 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것이 분열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성의 거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요.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부족한 부분까지 용납하고 오래 참는 예수님의 겸손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주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는 겁니다.
그런 모습, 주안에서 하나 됨이 여러분들을 통해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 더 생각할 것은 23, 24절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 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헬라 사람들의 지적 판단으로 볼 때 십자가는 가장 어리석은 겁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십자가는 지혜입니다. 능력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 속에 화목의 역사가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누가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오직 십자가를 의지해서만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있지요.
오직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십자가로 인해 내가 많은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십자가만이 나를 의롭다 합니다.
내 모든 악을 삭제하고 의롭다 하시는 역사가 십자가 안에 있는 겁니다.
이런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제 수평적으로 화목의 사람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 된 것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고로 여기서 형제애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즉 십자가로 인해 믿음의 사람, 진실한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의 신학을 가리켜 십자가 신학이라 합니다. 오직 십자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그는 자기 죄로 인해 고민한 사람입니다.
세상 문제로 고민한 게 아닙니다.
세상 불의 때문에 고민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 죄 때문입니다.
그 고민을 하면서 늘 보던 십자가를 다시 쳐다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루터는 십자가 신학을 세우게 되어집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새로운 십자가의 의미를 받아들이게 될 때 그는 새사람이 됩니다.
자기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지혜의 사람이 됩니다. 용서의 사람이 됩니다.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마침내는 종교개혁을 이루게 되어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십자가 그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크게 만져 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다시 보배롭고 존귀한 주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무엇보다 지나간 일들 다 잊어버리고 내 안에 새로운 일 행하신 주님만 바라보고
오직 주님의 그 사랑, 십자가에 사랑에 붙들려 사는 여러분의 남은 삶 살기를 축원합니다.
행복축제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목장에서도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십자가의 사람으로!
본문 – 고전 1장 10 -24절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정말로 예쁜 여자는 세수하지 아니한 얼굴을 남편에게 보이지 않는다!
여자가 남편을 위해서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가령 아무리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라 하더라도 밤새 자고 난 다음에 머리는 막 흐트려져서 북데기 같고
침을 흘려 볼에 자국이 나 있는데 거기에다 대고 I love you가 나오겠습니까? 감성적으로 말입니다.
사랑은 의지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흔히 정이니 뭐니 합니다만 사랑은 어디까지나 의지인 것입니다.
사랑으로 보는 겁니다. 사랑하고 보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에 계속 끌려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답게 봐주는 겁니다. 이래서 사랑도 믿음도 의지인 겁니다.
근데도 기분대로 사랑할 것입니까? 지능대로 사랑할 것입니까?
모름지기 의지로 사랑할 겁니다.
종교개혁이니 정치 개혁이니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 개혁입니다.
자기 개혁 없는 종교개혁, 사회 개혁이니 뭐니 하니까 세상이 더 혼탁하고 더 시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자기 개혁이 먼저입니다. 개혁이란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적이 아닌 것?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잘못된 것들을 다 제해 버리고 본디로 돌아가고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그래야 개혁입니다. 개혁이란 변화를 말합니다.
근데 이것은 의식적인 변화, 의지적인 변화, 새로워지는 변화입니다.
문제는 이 변화의 힘입니다. 이 변화의 의지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먼저 10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여기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그것은 상 반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한다 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목사의 이름이 아닙니다. 장로의 이름도 아닙니다. 권사의 이름도 집사의 이름도 아닙니다.
누구의 이름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한다! 이 말은 그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위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가장 높임을 받아야 하고요.
그분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교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가 아닙니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를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교회는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우리가 공동체를 이룬 곳입니다.
근데 고린도 교회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지 못해 지체들이 분열된 상황입니다.
근데 교회에서 이렇게 지체들끼리 분열하고 싸우는 이유를 보면 누가 틀려서가 아니라 내가 옳아서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의 옳음보다 내 옳음이 더 중요해집니다.
몇 년 전에 저희 노회에 속한 교회에 큰 분쟁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노회 서기였습니다. 노회장 했던 목사님이 그 교회 문제로 판사에게 불려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판사가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교회 안에서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면 누구도 말릴 재간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나 술 한 잔 마시면서 해결이 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양쪽 다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하며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과연 똑같은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이 맞습니까?
설령 내가 옳았고 싸움에서 이겼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승리라면 그것이 옳은 승리일까요?
무조건 양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교회는 뭘 잘하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의 몸을 세우는 곳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집중하지 않고 잘하려고만 하면 싸우게 되고요.
그러면 어느 기준이나 법이 우상이 되고 마는 겁니다. 12절 말씀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이 말씀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가 배운 사람 혹은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에 따라서 바울파, 아불로 파, 게바파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그 당시 유행했던 진리 전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신앙인이 되는 것을 유명한 교사로부터 진리를 전수받는 것으로 오해했고
또 서로 대립하는 학파 사이에 끊임없이 경쟁함으로 서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단순한 지적 가르침이나 배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삶을 바꾸는 것이며 내 힘 대신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어떤 학파를 조성해서 연구 논문을 계속해서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함께하며 말씀을 나누고 서로 필요한 은사들을 주고받으며 함께 자라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새 나의 눈을 가리고 있던 편견의 껍질이 벗겨지면서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어집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애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불순종하고 자기만을 주장하는 무서운 죄 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것이 분열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성의 거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요.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부족한 부분까지 용납하고 오래 참는 예수님의 겸손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주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는 겁니다.
그런 모습, 주안에서 하나 됨이 여러분들을 통해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 더 생각할 것은 23, 24절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 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헬라 사람들의 지적 판단으로 볼 때 십자가는 가장 어리석은 겁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십자가는 지혜입니다. 능력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 속에 화목의 역사가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누가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오직 십자가를 의지해서만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있지요.
오직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십자가로 인해 내가 많은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십자가만이 나를 의롭다 합니다.
내 모든 악을 삭제하고 의롭다 하시는 역사가 십자가 안에 있는 겁니다.
이런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제 수평적으로 화목의 사람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 된 것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고로 여기서 형제애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즉 십자가로 인해 믿음의 사람, 진실한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의 신학을 가리켜 십자가 신학이라 합니다. 오직 십자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그는 자기 죄로 인해 고민한 사람입니다.
세상 문제로 고민한 게 아닙니다.
세상 불의 때문에 고민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 죄 때문입니다.
그 고민을 하면서 늘 보던 십자가를 다시 쳐다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루터는 십자가 신학을 세우게 되어집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새로운 십자가의 의미를 받아들이게 될 때 그는 새사람이 됩니다.
자기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지혜의 사람이 됩니다. 용서의 사람이 됩니다.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마침내는 종교개혁을 이루게 되어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십자가 그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크게 만져 주시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다시 보배롭고 존귀한 주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무엇보다 지나간 일들 다 잊어버리고 내 안에 새로운 일 행하신 주님만 바라보고
오직 주님의 그 사랑, 십자가에 사랑에 붙들려 사는 여러분의 남은 삶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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