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3일 목장 나눔
페이지 정보
본문
목장 나눔 설교입니다.
목자님들 참고 하세요.
이번 주도 주안에서 좋은 날 되십시오.
믿음으로 산 남자들(2) 노아!
본문 – 히브리서 11장 7절
먼저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인생을 새롭게 열어주실 때 믿음으로 열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연다는 말은 말 그대로 문을 열고 지평을 열고 새로운 세계를 연다고 할 때의 그 말입니다.
우리를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옮겨 놓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신 것처럼 우리를 믿음으로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믿음의 영웅들? 그들의 삶은 어쩌면 현실감 없는 먼 옛날의 이야기로만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복잡한 현대를 사는 우리의 인생에서 그들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을 깊이 알게 함으로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이끄시는 겁입니다.
가만히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십시오. 어떤 분은 아브람처럼 갑작스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이 가라 하신 땅으로 가기 위해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길을 나선 인생이 있고요.
야곱처럼 오랜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훈련을 받는 가운데 있는 인생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하박국처럼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그런 인생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만나기 전의 바울처럼 내가 아는 하나님은 이래야 한다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인생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멀리서 찾을 것 없이 내 인생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때로는 아브람과 같은 때로는 야곱과 같은 때로는 하박국과 같은 내가 들어 있습니다. 이 연약하고 못난 인생들을 하나님께로 돌려놓으시는 것입니다. 특히 앞에서 말한 바울 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의 바울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다 맞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렇게 모질게 핍박한 거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는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몰랐던 겁니다.
아니 자기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줄 알았습니다.
자기 논리, 자기 세계에 갇혀 살면 누구나 그런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하나님은 찾아가시고 믿음으로 새로운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욥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난 뒤 했던 고백도 기억하십니까?
이전에는 내가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들의 고백이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여러분들에게도 꼭 있기를 축복합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는 노아의 믿음이 나옵니다. 저는 이 노아의 믿음을 보면서 믿음은 모험이다? 그것도 거룩한 모험이다!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오늘 노아 보십시오. 자신의 전 삶을 하나님께 다 맡기잖아요.
그의 미래도 다 맡기지요. 그런 면에서 믿음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늘 모험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모험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는 것? 대단한 모험입니다. 자신의 병든 몸을 의사에게 맡기는 것? 이것도 모험입니다. 직장을 선택하는 것도 직원을 선택하는 것도 모험입니다.
모험 가운데 영원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모험입니다. 오늘 본문은 노아의 믿음을 이렇게 압축해서 기록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은 짧지만 노아의 믿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들은 적도 없는 홍수 심판에 대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근데 이 경고? 어떻습니까?
보통 비 정도가 아니고 대홍수가 난다는 거잖아요. 이 대홍수 심판에 대해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모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해변도 아닌 곳에서 방주를 짓는다? 이것 또한 모험이지요.
그렇게 볼 때 노아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길은 참으로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간 길은 한결같이 좁은 길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거룩한 모험의 세계로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노아를 통해 모험하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배우게 될 겁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통해 그가 받은 상에 대해서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믿음이 더욱 강하게 세워지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 보십시오.
노아의 믿음을 한 구절로 요약해 설명하지요.
근데 창세기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이 노아의 믿음을 4장에 걸쳐서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아의 믿음을 자세히 알기 위해 창세기를 보아야 하는 겁니다. 창세기에서 노아 하면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홍수이지요. 대홍수 심판?
그러나 이 노아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노아의 이야기는 하나의 홍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홍수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물로된 홍수이지만 그 홍수 이전에 한 홍수가 더 있었다는 겁니다.
무슨 홍수일까요? 바로 죄악의 홍수였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여기 가득함은 히브리어로 라바인데 충분하다, 흘러넘치다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홍수 심판의 물이 흘러넘치기 전에 죄악의 물이 먼저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장 7절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알 수 있지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라!
이 정도로 죄악이 가득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노아 시대는 정말 악의 홍수 속에 있었습니다. 근데 오늘 이 노아에 대한 애기를 읽으면서 가장 슬픈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900세 정도로 장수했기 때문에 이미 노아 때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1절에 보면 사람들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근데 문제는 그렇게 많은 의의 후손들? 셋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완벽성, 완전성,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마지막에는 노아의 한 가정으로 축소되었다는 겁니다.
한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할렐루야 했는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다 세상을 따라갈 때 그때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바로 노아라는 것입니다. 노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지만 이것 하나라도 우리가 똑똑히 배워야 할 겁니다. 마태복음 24장 11절에서 13절의 말씀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여러분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로 살기를 축복합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주신 말씀 그리고 귀한 믿음 붙들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이 시대를 가리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합니다. 이 시대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이 뭔가 하면 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해체주의입니다.
이 해체주의가 무엇까지 해체하려 하는가 하면 우리의 신앙까지 해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맞물려 가는 것이 뭔가 하면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이 종교 다원주의의 특성은 상대화입니다. 다 상대화시키는 것입니다. 무엇까지 상대화 시키는가? 하나님까지 상대화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 신성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사상입니다. 이것이 신학자들 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만 믿어야 한다는 말은 아주 유아적 신앙이라 합니다.
또한 이단들이 난무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이 이단들이 예수의 이름을 들고 나옵니다.
이젠 신천지가요. 저 공원에 버젓이 자판을 펴놓고 전도하더라고요.
여러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들고나온다고 맞는 것이 아니고요.
어떤 선행과 어떤 구제로 다가온다 해도 그게 맞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좀 사랑이 없는 것 같고 구제와 선행이 부족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이고요.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입니다. 그렇게 믿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그분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는 여러분들 되길 축원합니다.
자,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서요.
노아가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서 있었습니까?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는데 그가 방주를 몇 년 동안 만들었지요? 120년?
6장 3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 하 반절 말씀요?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여기서 120년이란 말이 나왔는데요.
이 말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먼저는 이 말을 홍수 후에 사람들의 나이가 120세가 되었다는 말씀으로 오해가 되기도 했는데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홍수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120년보다는 더 살았지 않습니까? 한 예로 노아의 아들 셈은 600세를 살았고요. 아르바삭은 438년, 셀라는 433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120년은 인간의 수명을 제한한 햇수가 아니고요.
홍수를 내리기까지의 은혜의 기간이 120년이 될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은혜의 시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니느웨 성에는 40일간의 은혜의 시간?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을 주셨고요.
대홍수를 앞두고는 120년이라는 은혜의 긴 시간을 주신 겁니다.
이 시간에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은혜의 시간을 주시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면 내 생명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모두 120년간 방주를 만들었다고 말씀합니다.
대부분의 주석 가들도 그렇게 주석을 했습니다.
근데 6장 3절을 다시 잘 보시면 120년간 홍수 심판이 온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지 바로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요. 13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방주를 만들라 하신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이지요.
그러므로 방주를 만든 기간이 꼭 120년은 아닌 것입니다.
요즘은 한 70년 정도로 봅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노아가 120년 동안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붙들었다는 것이고요. 약 70년 동안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겁니다. 이게 귀한 것이지요.
여러분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장기적으로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주위의 사람들은 다 저리로 가는데 나만 혼자 말씀을 붙든다고 이리로 올 수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 9절은 노아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여러분, 노아의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노아는 의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타락했다는 것으로 변명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의롭지만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타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노아가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노아는 시대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대였지만 의롭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변명하면 안 됩니다.
회사가 그래서 세상이 그래서 나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다고 솔직히 말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 따라갔다고 말해야지 세상 때문이라 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노아 때와 방불합니다.
세상은 날로 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사탄의 미혹은 더 강해져 가고 있습니다.
노아의 믿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노아는 주변 환경에 이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의의 후사가 된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여러분들도 노아가 걸어간 이 믿음의 길 걷기를 축복합니다.
목자님들 참고 하세요.
이번 주도 주안에서 좋은 날 되십시오.
믿음으로 산 남자들(2) 노아!
본문 – 히브리서 11장 7절
먼저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인생을 새롭게 열어주실 때 믿음으로 열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연다는 말은 말 그대로 문을 열고 지평을 열고 새로운 세계를 연다고 할 때의 그 말입니다.
우리를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옮겨 놓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신 것처럼 우리를 믿음으로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믿음의 영웅들? 그들의 삶은 어쩌면 현실감 없는 먼 옛날의 이야기로만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복잡한 현대를 사는 우리의 인생에서 그들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을 깊이 알게 함으로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이끄시는 겁입니다.
가만히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십시오. 어떤 분은 아브람처럼 갑작스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이 가라 하신 땅으로 가기 위해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길을 나선 인생이 있고요.
야곱처럼 오랜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훈련을 받는 가운데 있는 인생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하박국처럼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그런 인생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만나기 전의 바울처럼 내가 아는 하나님은 이래야 한다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인생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멀리서 찾을 것 없이 내 인생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때로는 아브람과 같은 때로는 야곱과 같은 때로는 하박국과 같은 내가 들어 있습니다. 이 연약하고 못난 인생들을 하나님께로 돌려놓으시는 것입니다. 특히 앞에서 말한 바울 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의 바울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다 맞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렇게 모질게 핍박한 거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는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몰랐던 겁니다.
아니 자기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줄 알았습니다.
자기 논리, 자기 세계에 갇혀 살면 누구나 그런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하나님은 찾아가시고 믿음으로 새로운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욥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난 뒤 했던 고백도 기억하십니까?
이전에는 내가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들의 고백이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여러분들에게도 꼭 있기를 축복합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는 노아의 믿음이 나옵니다. 저는 이 노아의 믿음을 보면서 믿음은 모험이다? 그것도 거룩한 모험이다!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오늘 노아 보십시오. 자신의 전 삶을 하나님께 다 맡기잖아요.
그의 미래도 다 맡기지요. 그런 면에서 믿음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늘 모험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모험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는 것? 대단한 모험입니다. 자신의 병든 몸을 의사에게 맡기는 것? 이것도 모험입니다. 직장을 선택하는 것도 직원을 선택하는 것도 모험입니다.
모험 가운데 영원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모험입니다. 오늘 본문은 노아의 믿음을 이렇게 압축해서 기록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은 짧지만 노아의 믿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들은 적도 없는 홍수 심판에 대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근데 이 경고? 어떻습니까?
보통 비 정도가 아니고 대홍수가 난다는 거잖아요. 이 대홍수 심판에 대해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모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해변도 아닌 곳에서 방주를 짓는다? 이것 또한 모험이지요.
그렇게 볼 때 노아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방주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길은 참으로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간 길은 한결같이 좁은 길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거룩한 모험의 세계로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노아를 통해 모험하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배우게 될 겁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통해 그가 받은 상에 대해서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믿음이 더욱 강하게 세워지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 보십시오.
노아의 믿음을 한 구절로 요약해 설명하지요.
근데 창세기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이 노아의 믿음을 4장에 걸쳐서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아의 믿음을 자세히 알기 위해 창세기를 보아야 하는 겁니다. 창세기에서 노아 하면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홍수이지요. 대홍수 심판?
그러나 이 노아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노아의 이야기는 하나의 홍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홍수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물로된 홍수이지만 그 홍수 이전에 한 홍수가 더 있었다는 겁니다.
무슨 홍수일까요? 바로 죄악의 홍수였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여기 가득함은 히브리어로 라바인데 충분하다, 흘러넘치다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홍수 심판의 물이 흘러넘치기 전에 죄악의 물이 먼저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장 7절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알 수 있지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라!
이 정도로 죄악이 가득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노아 시대는 정말 악의 홍수 속에 있었습니다. 근데 오늘 이 노아에 대한 애기를 읽으면서 가장 슬픈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900세 정도로 장수했기 때문에 이미 노아 때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1절에 보면 사람들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근데 문제는 그렇게 많은 의의 후손들? 셋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완벽성, 완전성,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마지막에는 노아의 한 가정으로 축소되었다는 겁니다.
한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할렐루야 했는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다 세상을 따라갈 때 그때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바로 노아라는 것입니다. 노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지만 이것 하나라도 우리가 똑똑히 배워야 할 겁니다. 마태복음 24장 11절에서 13절의 말씀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여러분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로 살기를 축복합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주신 말씀 그리고 귀한 믿음 붙들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이 시대를 가리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합니다. 이 시대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이 뭔가 하면 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해체주의입니다.
이 해체주의가 무엇까지 해체하려 하는가 하면 우리의 신앙까지 해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맞물려 가는 것이 뭔가 하면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이 종교 다원주의의 특성은 상대화입니다. 다 상대화시키는 것입니다. 무엇까지 상대화 시키는가? 하나님까지 상대화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 신성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사상입니다. 이것이 신학자들 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만 믿어야 한다는 말은 아주 유아적 신앙이라 합니다.
또한 이단들이 난무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이 이단들이 예수의 이름을 들고 나옵니다.
이젠 신천지가요. 저 공원에 버젓이 자판을 펴놓고 전도하더라고요.
여러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들고나온다고 맞는 것이 아니고요.
어떤 선행과 어떤 구제로 다가온다 해도 그게 맞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좀 사랑이 없는 것 같고 구제와 선행이 부족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이고요.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입니다. 그렇게 믿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그분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는 여러분들 되길 축원합니다.
자,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서요.
노아가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서 있었습니까?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는데 그가 방주를 몇 년 동안 만들었지요? 120년?
6장 3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 하 반절 말씀요?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여기서 120년이란 말이 나왔는데요.
이 말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먼저는 이 말을 홍수 후에 사람들의 나이가 120세가 되었다는 말씀으로 오해가 되기도 했는데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홍수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120년보다는 더 살았지 않습니까? 한 예로 노아의 아들 셈은 600세를 살았고요. 아르바삭은 438년, 셀라는 433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120년은 인간의 수명을 제한한 햇수가 아니고요.
홍수를 내리기까지의 은혜의 기간이 120년이 될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은혜의 시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니느웨 성에는 40일간의 은혜의 시간?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을 주셨고요.
대홍수를 앞두고는 120년이라는 은혜의 긴 시간을 주신 겁니다.
이 시간에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은혜의 시간을 주시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면 내 생명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모두 120년간 방주를 만들었다고 말씀합니다.
대부분의 주석 가들도 그렇게 주석을 했습니다.
근데 6장 3절을 다시 잘 보시면 120년간 홍수 심판이 온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지 바로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요. 13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방주를 만들라 하신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이지요.
그러므로 방주를 만든 기간이 꼭 120년은 아닌 것입니다.
요즘은 한 70년 정도로 봅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노아가 120년 동안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붙들었다는 것이고요. 약 70년 동안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겁니다. 이게 귀한 것이지요.
여러분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장기적으로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주위의 사람들은 다 저리로 가는데 나만 혼자 말씀을 붙든다고 이리로 올 수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 9절은 노아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여러분, 노아의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노아는 의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타락했다는 것으로 변명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의롭지만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타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노아가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노아는 시대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대였지만 의롭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변명하면 안 됩니다.
회사가 그래서 세상이 그래서 나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했다고 솔직히 말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 따라갔다고 말해야지 세상 때문이라 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노아 때와 방불합니다.
세상은 날로 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사탄의 미혹은 더 강해져 가고 있습니다.
노아의 믿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노아는 주변 환경에 이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의의 후사가 된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여러분들도 노아가 걸어간 이 믿음의 길 걷기를 축복합니다.
- 이전글10월 20일 금요일 목장나눔 23.10.16
- 다음글10월 6일 목장나눔 23.09.2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