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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목자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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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새새
댓글 0건 조회 564회 작성일 23-05-31 10:19

본문

두인균 목사입니다.
목자님들 섬김에 감사합니다.
이번주로 주안에서 승리하십시오. 축복합니다.

지난 주 설교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문 – 창세기 1장 26 - 28절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알베르 까뮈는 사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의미 없는 것을 반복하는 삶에 던져진 존재다!
그것이 우리 모든 인간에게 내려진 형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시편 144편 3절, 다윗의 고백입니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우리는 결코 의미 없는 삶에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아담 보십시오.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 죄를 범함으로 숨어 있었지만
아담아, 너가 어디 있느냐 하며 애타는 심정으로 하나님이 찾아가시잖아요.
그런 마음으로 오늘 우리도 찾아와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복된 삶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가 복되고 존귀한 존재라는 겁니다.
근데 이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삽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릴 가리켜 존귀한 존재라 합니다. 시편 16편 3절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오늘 본문도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 하지요. 26절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이 말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극치요, 절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갈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 외에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가치를 이 정도로 소중하게 표현하고 있는 데가 없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49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15, 16절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여기 16절 상 반절 말씀요,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놓고 보실 정도로 귀히 여기신다는 거잖아요.

요즘 아이들 어른들 할 것 없이 감기와 독감이 유행하고 있지요.
아이들 아프면 부모들이 자다가도 아이들 머리에 손을 대어 보잖아요.
열이 떨어졌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소중히 여겨 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놓으실 정도로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임을 안다면
아무리 내 인생의 앞길에 장애물이 있고 답답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받은 자의 축복이고요. 주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입니다.

저는 이 말씀인하여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어떤 어려움, 어떤 좌절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주님으로 인해 능히 일어설 수 있는 존재다!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보십시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있었던 특별한 점을 말씀합니다.
먼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 안에서 의논이 있었다는 겁니다.
26절 다시 잘 봐 보십시오. 같이 26절 읽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여러분, 이 한 구절에 우리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옵니까? 세 번이지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여기 우리라는 표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곤욕스러운 것일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어야 합니다.
근데 창세기 처음부터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삼 위 하나님의 의논이 있었다는 겁니다.

사람을 왜 창조하셨으며 그들이 죄를 지었을 때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책임질 것에 대한 거기에 이르기까지 성 삼 위 하나님 사이에 미리 의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 가운데 우리를 초청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히 밥 먹고 자식 키우고 직장 생활하라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에 우리를 초청하여 그 영광을 맛보고 나누고 그 안에 거하도록 우리를 만드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때도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의논이 있은 후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우연히 생긴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되찾아야 할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이 더욱 드러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끝으로 하나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사람에게 주신 특별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특권을 우리 사람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26절 하 반절의 말씀이지요.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그리고 28절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두 구절을 종합해 보면 다스린다는 말은 생육, 번성, 충만, 정복이라는 단어를 모두 포함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지요.
그러다 보니 이 다스린다는 단어가 앞에 명령한 정복하라는 단어와 맞물리면서 그 의미가 곡해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어떤 물리적인 파워, 힘으로의 정복으로 곡해가 된 겁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국주의적 선교 방식인데요.
이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것처럼 십자가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복음의 증거나 섬김을 통해 번성과 충만 그리고 정복을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복의 논리로 침략을 정당화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의미로 이 다스림이라는 단어가 잘못 적용된 적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 다스린다는 단어를 잘못적용해 과거 기독교 국가들, 영국이 그러했습니다. 포르투칼이 그러했습니다.
강압적으로 약한 나라들을 지배했습니다. 다스렸습니다.

지금 그 나라들이 다스렸던 나라들이 어떻습니까?
다 이슬람 화 되어 있습니다. 흰두교화가 되어 있습니다. 참 가슴 아픈 과거 역사입니다.

여러분, 여기 다스림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섬김입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원래 다스린다는 의미는 은사입니다. 로마서 12장 8절에 나옵니다.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여기 다스림을 은사로 말하지요. 고린도 전서 12장 28절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워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여기서도 다스리는 것이 은사로 나와 있지요.
은사는 남을 섬기라고 세우라고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힘을 키워서 남을 압제하거나 남을 곤경에 빠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섬기라고 주신 겁니다.
그렇다면 다스림은 남을 섬기는 것이 되지요.

성경에서 집사의 자격을 말할 때 어떻게 말합니까?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
이때에 다스림도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 여기 다스린다는 말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것에도 굴복당하지 않는 당당한 자존감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존감은 그런 자존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서의 가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 값으로 산 우리의 가치를 알기에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무릎을 꿇거나 머리를 숙이지 않는 당당함을 말하는 겁니다.

우상에 절하지 않습니다.
황제 숭배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가난도 질병도 심지어 사람들의 비난도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배하라는 것은 이렇게 그 어떤 것에도 지배당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우리 신자들을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기준입니다.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나에게 손해가 되어도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면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만 가지 은혜를 입은 자들이지요.
이제 우리가 드러내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삶 오직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살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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