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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 목장나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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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새새
댓글 0건 조회 97회 작성일 24-09-20 13:37

본문

이번주 목장 나눔 요약입니다.
여름 더위가 막바지인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일 설교입니다.
설교 후 찬양은 말씀 앞에서입니다.
감사합니다.


지금은 말씀으로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본문 – 왕 상 16장 29 – 17장 7절

 

여러분, 우리 사람이 몸이 아프게 될 때 나타나는 증상이 무엇입니까? 통증입니다.

그러나 정말 당황스러운 것은 무서운 병으로 죽어가는데도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간암이나 폐암 같은 질병은 너무나도 무서운 병인데 이런 병이 생겨서 자라고 있어도 본인은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겁니다.

 

근데 여러분, 문제는 신앙이 병든 때도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를 향해 가면서도 본인은 거의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단지 느낀다면 마음에 기쁨과 감격이 없어지는 겁니다.

양심이 불편한 정도입니다.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무시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도가 심해지게 되면 한순간에 절망의 낭떠러지를 향해 곤두박질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내가 하나님께 가까워지고 있는지 아니면 죄를 향해 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으로 살려고 몸부림칠 때 엄청난 미래의 축복을 약속해 주신다는 겁니다.

 

다윗 보십시오.

그는 천한 목동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니까 하나님이 그를 기름 부으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잖아요.

그리고 그의 후손이 계속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셨지요.

그러나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처음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의 길을 갔지만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따라가게 되지요.

 

그러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뚝 떼어서 솔로몬이 제일 싫어하던 여로보암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깨닫게 하는 방식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축복을 받은 자들이 신실하지 못하면 그 축복을 빼앗아서 그들이 천히 여기는 자들에게 주십니다.

근데 여로보암마저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의 가정을 벌하시고 그들보다 더 못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에는 3년 반의 흉년을 내리시고 이방인 사르밧 과부의 집에는 축복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먼저 16장 30절을 보십시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여러분, 이 말씀은 아합왕 때 시대적 상황 아니 영적 상황을 보여줍니다.

이때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암흑기였습니다. 31절도 같이 읽습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이처럼 아합왕은 죄에 대해 감각이 무디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무디어지면 느낌이 없습니다. 죄를 지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입니다.

남이 죽어가고 있어도 별 느낌이 없습니다.

 

몇 년이 지났는데요.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콜로라도 덴버의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중무장을 한 두 학생이 다른 학생들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13명의 꽃다운 학생들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근데 참 놀라운 것은 그렇게 총을 난사한 이유가 자기들이 낸 의견을 듣지 않았다는 즉 무시했다는 거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을 향해 총을 쏘면서 웃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죄악에 무감각해져 버린 모습입니다.

친구들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아합 시대의 특징이었습니다. 무감각?

 

아합의 가장 큰 실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 34절입니다.

 

그 시대에 벨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무찌른 성이 여리고 성인데 그 성을 무찌른 후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 6장 26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 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이토록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도 그 시대에 즉 아합의 시대에 여리고 성을 재건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고 성을 재건하려 한 겁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장자가 죽고 막내아들도 죽은 겁니다.

 

여러분, 아합의 시대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버린 시대는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말씀만이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줍니다.

죽은 양심을 다시 뜨겁게 만드는 생명력도 이 말씀 안에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버리면 말씀 대신 바알의 풍요함을 추구하면 살아 있기는 하지만 실제 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아합의 시대를 살면 영적 생명은 죽어 사라져 버립니다. 말씀을 포기하면 결국은 다 잃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권위를 회복해야 내 영도 살고 내 삶도 살게 되는 겁니다.

말씀을 다시 확고히 붙드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자 이제 이어지는 17장 1절을 보십시오.

 

길르앗에 우거 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짤막한 한 구절이지만 이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귀한 교훈을 줍니다.

특별히 엘리야를 어떻게 소개하는가를 잘 보십시오.

길르앗의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

이게 엘리야에 대한 프로필 전부입니다.

 

다른 성경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중요한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상당한 분량의 개인 프로필을 제공합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2장에 보면

모세의 경우 태어날 때부터 그의 출생, 성장 등등 아주 시끌벅적하게 얽히고 설힌 드라마틱한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의 출신 배경, 가정환경, 성장 과정 등등 다 생략해 버립니다.

심지어 그에 대해 어떤 추측을 할 수 있는 근거조차 기록하지 않아 마치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로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딱 한 가지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이었다고 밝힐 뿐입니다.

 

여러분, 길르앗은 요단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시골 마을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는 시골 출신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의 출현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번쩍하고 온 천지를 밝히는 번개불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분히 아무도 예기치 못한 돌발적인 등장인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예비하셨고요.

그를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아무도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등용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본문이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인물을 생각하지 못한 때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시고 또 예비하시고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상식과 너무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곳에 생각하지도 못한 인물을 당신의 역사를 위해 일할 일꾼으로 준비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다 그랬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한낱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사울이 국가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갈 때에 그를 폐위시키시고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이스라엘을 통일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이새라는 사람의 집에 사무엘을 보냅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8명의 아들과 인터뷰를 합니다.

아버지 이새는 아들 8명 중에서 막내 다윗을 빼놓습니다.

사무엘이 하나하나씩 인터뷰를 다해 가는데 하나님이 사인을 안 줍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이 아들이 전부냐?

그러자 이새가 답합니다. 사무엘상 16장 11절인데요.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내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여러분, 여기 이새의 말?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원어의 어감을 그대로 살리면 이렇게 됩니다.

아직 막내 녀석이 남았지만 그는 양떼나 지키는 자입이다!

볼 것 없다는 겁니다. 그런 아이 볼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버지 이새도 인정하지 않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아들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자였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귀중한 교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누구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기대하는 마음, 소망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가정에 그런 인물이 있을지 모릅니다.

철모르고 뛰어다니는 어린 애들 가운데 그런 인물이 자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방황하고 곁길로 빗나가면서 부모의 속만 끊게 만드는 그 아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인물인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에 대해서도 당신은 아니야!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행해서도 나는 나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사람이 아니야!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는 목사가 하고 싶어서 목사가 되는 겁니까?

생각지 않았던 때에 하나님이 부르시면 목사가 됩니다.

실은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은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그렇게 쓰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길 축복합니다.

 

끝으로 하나 더 살펴볼 것은 5절입니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체하지 않고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곧 가서! 조금의 주저함이 없습니다. 머뭇거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즉각적으로 움직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은 묵상 자료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습니다.

묵상할 때는 묵상하지 않고 명령이 떨어졌는데 그 명령을 묵상합니다.

그렇게 하면 곤란해집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묵상하고 있으면 갈등만 생깁니다. 회의와 의심만 생깁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으면 신속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곧바로 가버려야 뒤탈이 없습니다. 곧 행하지 않으면 마음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 앞에 바로의 반응이 그러합니다.

그렇게 하겠다 하다가 금방 못하겠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못 보내겠다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보내면 누가 성을 건축하나? 손해가 엄청나겠거든요.

그걸 생각하고 못 보내겠다 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애굽의 장자가 다 죽는 더 큰 비극을 초래하게 되지요.

 

하나님이 보내라 하면 보내야 합니다.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이 있다면 포기해야 합니다.

갈등만 하고 있으면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옳다고 여겨지면 빨리 결단할수록 좋습니다. 머뭇거리지 않는 것이 이익입니다.

 

여호수아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백성들에게 결단할 것을 촉구하지요.

여호수아 마지막 장인 24장 15절이지요. 같이 읽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늘 이 순간 택해야 합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걸리는 것들이 너무 많아 못합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머뭇거리다가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머뭇거리면 시험당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저것 생각하다가는 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결단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면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겁니다.

엘리야는 말씀을 들은 대로 즉각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그 결과가 6절입니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까마귀가 먹을 것을 물어다 주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이런 경험들은 신앙인들이 말씀대로 살아 갈 때에만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대로 사는 훈련?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면 단순하게 움직이는 훈련을 하면서 살아 보십시오.

이런 훈련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으면 손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살면 신앙의 위대함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우리에게 점점 더 깊은 신앙인의 삶의 기쁨을 허락할 겁니다.

 

여러분의 남은 삶이 그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 말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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